-- 시냇가에 심은 나무 제4호  --


- 주제토론  -

선거에 대한 기독교인의 5가지 오해


도상윤 집사




몇 달 전 한겨레 신문에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한 내용이 보도되었다. 내용인즉 한국인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이중성의 국민이라는 아주 부끄러운 결과였다.

원칙에는 동의하고 인정하지만 자신과 관련된 사실에 대해서는 원칙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예로 과외가 한국을 망가뜨리는 망국병이라는 전부 의식하지만 내 자식을 대학에 보내려면 과외를 해야 한다는 것이라든지, 남녀차별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에 대해 모두 이견이 없지만 내 자식은 남자이어야 한다는 식이다.

선거에 있어서도 이중성은 확연하여 지역이나 인물보다는 공약과 정책을 기준으로 선거를 해야 한다고 전부 입을 모으지만 정작 자신이 투표소에 들어가서는 자신의 고향 사람 또는 자신의 이익집단을 대변하는 후보를 선택하겠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하여 최근 이화여대 한국학과 최준식 교수는 <한국인에게 문화는 있는가?> (사계절)라는 책을 펴냈다. 그리고 한국에서 23년째 주재하고 있는 일본 상사 맨 모모세 타다시도 자신의 한국 경험을 바탕으로 쓴 <한국이 죽어도 일본을 못 따라잡는 18가지 이유> (사회평론)를 펴냈는데 둘 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한국인의 자학적 취미 때문이 아니라, 요즘 한국인들이 한국인 스스로의 인성에 대해 느끼는 위기의식 탓일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한마디로 한국인은 자신의 가족과 혈연에 얽혀 남을 배려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이 입시와 관련되어지는 다른 자식들은 대학에 다 떨어져도 내 자식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학에 보내야 겠다는 것이며, 선거에서는 국가적 정의나 사외의 바람직한 모습과는 상관없이 무조건 나와 조금이라도 가까운 사람이 당선되어야 한다는 식의 선거문화가 판쳐왔다.

한국에 사는 그리스도인들 또한 이중적 위선자의 모습으로 선거와 사회의 여러 문제에 애써 외면하여왔던 것이 사실이다. 전두환 정권의 쿠데타를 기독교계의 일부 몰지각한 지도자들이 합세하여 정당화 시키는데 일조한 것이나 정권분리를 주장하는 기독교계 지도자들이 4.3호연조치를 지지한 사실 등은 세상 권력과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한 혼동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혼동 속에 이번 대선과 관련하여 너무나 당연한 그러나 대부분 애써 눈감아 버리고자 하는 선거에 대한 오해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나타나는 가장 첫 번째 선거에 대한 오해는 그리스도인은 선거와 관련 없으며 그리스도인은 세상 권력에 대한 문제에서 벗어난 초월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에 치중해야 한다는 의식이다.

이 의식의 저편에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거룩한 관계이고, 세속적인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악이라는 이원론적 사고가 깔려 있다.

그런데 이러한 오해에는 중대한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간과해서는 안되는 매우 불경스런 신성모독과 책임회피가 자리잡고 있다. 설령 세속적인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추구해서는 안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러한 세속세계의 모든 것을 다스릴 뿐 아니라 악의 세력 또한 하나님의 능력 아래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시민으로서 그리고 세속세계에 살아가는 자연인으로서 하나님이 모든 영역을 다시리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각 영역에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서로 모순되는 패러다임을 자처하는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두 번째로 선거와 관련된 오해는 선거는 국민에 의하여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국민의 선택이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또한 그리 틀린 생각은 아닐지라도 현대사회의 타락한 인간성 특히 패배의식과 권력 지향적인 이중적 가치관을 가진 한국인의 현실을 그리스도인이 간과하지 않는다면 국민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일반대중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인이 가진 절대적 하나님의 가치관에 의거하여 선거에 임해야 하며 어느 쪽이 최선의 선택인가에 대하여 연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선이 아니라면 최소한 차선이라도 선택하여 정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대통령을 만든 다수에 속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정의를 외치는 소수에 속할 수 있는 의식이 필요하며 그 소리가 다수가 되었을 때에 대통령 본인이 그러한 정의를 제대로 실천하도록 해야 한다.



세 번째 오해는 선거는 될 사람을 밀어야 한다는 의식이다. 이 때문에 연일 계속되는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선두에 서 있는 후보를 밀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을 한다. 대세는 이러하니 이 후보가 되어야 한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의 정의가 다수결에 의한 선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 선거는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지고 있다.

한 후보가 나가 그 후보가 내건 공약 또는 그 후보와 관련된 대표적 집단의 민의 수렴성을 무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김종필을 예로 들면 그는 지난 대선에서 약 10%의 득표가 지니는 지역성과 김종필 후보의 보수성을 지지하는 세력의 결집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나타나 벌써 정계를 은퇴해야할 사람이 내각제를 들과 나와 정치생명을 연장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누가 대통령이 되는 가도 중요하지만 어느 후보의 어떤 차별성에 민의가 결집되는지에 대한 결집성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될 사람을 밀어준다는 식의 생각에서 벗어나 진정 하나님의 정의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 대하여 가장 많은 배려를 이야기하는 후보를 선택해야 한다.

선거에 대한 네 번째 오해는 지역 사람을 밀어야 지역이 발전한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지역할거주의는 나 또한 내 지역만 발전하면 되고 다른 지역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매우 이기적인 생각에서 시작된다.

이를 더 확대한다면 어느 후보를 선택할 경우 나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지를 바탕으로 후보를 선택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를 위해 다른 사람은 희생시켜도 된다는 식의 생각이니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도리가 있겠는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해서라도 내가 원하는 후보가 아닌 모든 사람을 위한 후보를 선택해야 한다. 그 후보가 당선되지 않더라도 최소한 모든 사람을 위한 후보의 공약과 그의 개혁성이 하나의 힘을 가질 수 있는 계
기를 마련하기 때문이다.



선거에 대한 마지막 오해는 선거는 선거 당사자의 능력과 사람을 보고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그 중심을 본다는 하나님의 성품에 어긋난다. 그 사람의 능력이나 그의 사람됨은 현대와 같은 다원적 사회에서는 하나의 구심점은 될 수 있어도 힘을 발휘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사람보다는 그 사람의 기반을 이루는 참모세력의 선명성이 그 사람의 개혁성을 판가름할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선택은 그 사람보다 그 사람의 기반세력의 능력과 의식을 봐야 한다는 것이 더 정확한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선진국에서는 국회의원의 선거시 사람을 보고 선택하는 선거가 같이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제 선거가 약 30일 정도 밖에 남지 않았지만 분명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이 30일의 기간동안 여론이나 매스미디어의 선전에 현혹됨 없이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최선의 후보, 최선이 아니라면 차선의 후보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며 우리의 이웃을 생각하는 기간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