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냇가에 심은 나무 제3호 <1997.8> --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한천설목사(총신대 신대원 강사)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사도행전 23:1-10)


일찍이 동방의 예의 지국이라 불리우던 우리나라 땅에서 ‘양심’이란 단어는 오래 전에 벌써 그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습니다. 간혹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도덕책에나 등장할 뿐입니다. 누구 하나 자녀를 양심대로 살아가도록 키우려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어떻게 해서라도 남보다 더 똑똑하고 더 교활하게 키워, 남보다 더 부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 모든 부모의 꿈인 것 같습니다. 부모의 머리 속에는 양심이란 단어자 아니라, 돈과 땅과 재산 등등 이런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학교에서 그래도 가끔 들을 수 있는 이 단어는 학교의 문을 나서면서 사회에 뛰어 들기 전에 누구나가 버리고 와야할 무거운 짐으로 간주합니다.

양심이란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대체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직도 양심을 말하는 사람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순진한 사람이요, 곧 도래될, 기껏해야 인생의 막차를 타고 저 뒤에서 헉헉거리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좀더 나은 자리, 좀더 많은 재산을 차지하려고 있는 힘을 다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생존경쟁을 하고 있는 사람들 틈에 혹시 양심을 말하는 사람이 끼여 있으면, 이들은 모질게 다져먹은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방해꾼들로 취급받기 마련입니다.


한국은 오래 전에 양심을 상실한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모두가 자기의 이득만을 위해 살아가고, 자기의 실리를 위해 양심을 잠재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며, 불신자들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기독교인들도 별로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전국민의 25%가 기독교인이라는 숫자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때문에 이 한국사회가 맑아지고, 정직해지고, 양심적인 사회가 되고, 이 사회가 바른 길로 나아가고 있다고 평가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듯 합니다.

아니 오히려 그 정반대로 그리스도인들도 불신자들과는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사람들로 이 총체적 부패에 큰 몫을 했다고, 그래서 이런 상태라면 전체인구의 100%가 기독교인이 된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 것이 없다고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핑계 삼아 교회 안에서의 삶과 교회 밖에서의 삶을 너무도 판이하게 다르게 살아가므로 이중생활, 이중인격의 소유자들로 낙인 찍힌채 정말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함께 마음에 새겨 보아야 할 것은 우리가 동일하게 모질고 험난한, 더럽고 부패했고 비양심적인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도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습니다.”라고 외친 바울 사도의 고백입니다. 양심을 비웃는 세상에서 그는 마치 “나는 바보입니다.”라고 소리지르는 것 같습니다.

양심을 파묻어야만 그래도 웬만큼 살 수 있다고 하는 세상에서 그는 마치 생존경쟁을 포기한 채 뜬구름만 바라보는 낯선 나그네 같습니다.

바울 처럼 우리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이 살벌한 하늘 아래서 “나는 양심을 따라 삽니다.”라고 중얼거릴 가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매일 우리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심각한 결단을 해야만 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가정과 학교에서 그리고 직장과 사회에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심각히 고민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 사회는 아직도 불신자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의 양심을 다른 어느 나라에서보다 더 많은 도전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태도로 여러분의 기독교적 삶을 위협하는 순간순간을 통과하고 계십니까?

지금 여러분의 양심을 지키고 계십니까? 양심대로 살아가십니까? 그 양심을 하나님 앞에, 그리고 사람들 앞에 내어 놓아도 떳떳하십니까?
아니면, 이 세상의 것들을 조금이라도 더 움켜쥐기 위하여 매일 양심을 포기한 채 양심을 속이며 괴로워하며 슬퍼하고 살고 계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분이 예수님의 보혈과 그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추악한 죄와 더러운 마음을 씻어 주셨
다고 고백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 분이 주시는 구원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 기독교인들이야말로 바울사도 처럼 “이 더러운 세상에서도 더럽게 살지 않고 양심을 따라 산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즐기며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기독교인들이 아니면 누가 이세상이 잘못되었다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양심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 기독교인이 아니면 누가 그래도 양심은 살아 있다고 말해 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계시는 곳곳에서 양심을 거역하므로 고통 당하고 매일 쓰라린 가슴으로 하나님 뵙기를 민망해 하시지 말고,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양심의 호소를 들으심으로 순간순간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좀 손해를 보시면 안됩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보혈을 우리를 위해 버리셨습니다.

무고한 피해를 감수하시는 것이 정말 못 견딜만한 일입니까? 주님은 우리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돈을 버는 일에, 세상의 일에 남보다 앞서지 못하고 뒤고 쳐지는 것이 그렇게 못 마땅합니까? 예수님은 여러분을 위해 그 고귀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 만이라도 삶의 현장에서 양심을 지킬 수 있다면, 매일 양심의 소리를 들으며 살아간다면, 아니 꿈틀거리는 양심의 고동을 잠재우려 들지만 않는다면, 우리 사회가 조금은 밝아지리라 생각합니다.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긴다”는 바울사도의 외침이 여러분의 것이 되어, 여러분의 가슴에서 매일 어디서나 메아리쳐 나오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