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냇가에 심은 나무 제2호 <1997.5> --


- 주제토론 -

인간복제, 왜 심각한 문제인가?


심백섭 (서강대 교목실 근무)




[하나]
평화신문 3월 16일 자에는 녹색연합과 교회환경연구소 등 환경단체와 YMCA등 종교 시민단체들이 3월 7일 오후 광화문 빌딩 앞에서 유전자 복제 반대 시위를 갖고 생명체 복제에 대한 적극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는 기사가 실려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이들 단체들은 “지난달 영국에서 양의 복제가 성공한 이후 세계 곳곳에서 복제 생명체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며 “동물 복제는 인류의 복지를 위해 사용해도 된다는 발상 자체가 인간복제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고 경고했다고 한다.

정치,경제적인 문제에 비해 근본적인 생명의 문제에 대한 관심을 민감하게 보이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 안에서도 일각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사실 올해 들어 영국에서 다 큰 양을 복제해서 똑 같은 개체를 만들어 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른 곳에서 복제 원숭이를 만들어 놓으면서 온 세상이 동물 복제문제를 놓고 떠들썩하고 있다. 그것은 이제 인간복제의 문제가 눈 앞에 임박했다는 위기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의 평화신문 기사도 그들 단체들이 정부에 대해 “인간복제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생물복제에 대한 연구도 금지시키고 이에 대한 지원을 일체 하지 말라”고 축구하면서 유전자 복제를 위한 국가생명윤리위원회를 설치하라고 주장했음을 알리고 있지만, 각국에서는 이미 인간 복제를 금지하는 규약이나 법률을 준비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유럽연합에서는 동물 복제행위조차도 금지해야 할지도 조사하고 있으며, 클린턴 행정부는 동물 복제 실험을 정부가 지원하는 것을 금지했다.


[둘]
그렇다면 왜들 이렇게 시끄러운 것일까? 과학은 실용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이고, 이번 동물 복제의 성공도 인간의 생명과 건강에 기여하려는 노력의 결과가 아닌가? 실제로 식량 공급과 생물약제 생산 그리고 이식 및 연구용 장기의 마련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은가?

인간에게 기여할 바가 적지 않을텐데 왜 이렇게 인간 복제의 임박한 가능성을 놓고 반대와 금지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일까? 인간복제를 금지해도 결국 비밀리에라도 인간복제는 이루어질 가능성이 큰데, 이렇게 반대하고 금지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식의 의문들을 우리는 계속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근본적으로 근대적 정신의 성격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할 필요가 있다. 동물이나 인간의 복제는 사실 이 근대적 과학 기술 문명의 한 정점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 문명은 인공과 인위의 문화다.

밖으로는 신성한 우주로 안으로는 신성한 생명 안으로 들어간다. 달에는 발자국을 남기고 생명 세포 안에는 손자국을 남긴다. 신성한 것은 점차 추방된다. 마지막으로 추방되어야 할 신성한 영역은 우주의 신비와 함께 생명의 신비다.

그래서 가톨릭 교황청에서는 낙태나 인공 수정을 금지해왔고, 이번 동물 복제 후에도 즉각 각국 정부에 인간복제연구를 금지시킬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 인간복제야말로 인공수정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문제로 인식한 것이다.

그러나 생명이 침범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라는 얘기는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먹혀 들지 않는다. 신성한 것을 추방하면 발전해 온 근대문명의 정신에 볼 때 그것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적 정신은 모든 것들을 인간의 이익과 목적을 위하여 인간이 관찰하고 조작하고 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변질시킨다는 문제가 있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자연 파괴의 위기를 안겨주는 것이다. 동시에 인간 역시 대상화 한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인간의 신체는 기계처럼 취급되어 그 생명의 과정들이 간섭받고 각자의 이익에 따라 간섭하고 또 지배 당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노동은 너무나 상품화 되었다.

결국 인간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신성한 것을 추방한다는 근대 과학 기술 문명의 정신은 인간을 위해하고 수단화하는 반대의 결과를 점차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만지는 것마다 금이 되기를 원했다가 자신의 몸마저 생명없는 금으로 변해 버렸다는 어느 공주의 우화가 여기서 실감나게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


[셋]
앞의 평화신문에는 그들 단체들이 유전자 복제 기술을 인류에게 재앙을 안겨다 줄 “악마”라고 규정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그렇다. 인간복제는 단언하건대 악임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건드려서는 안 될 마지막 생명나무를 건드리게 될 때에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을 안겨다 준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인간 복제는 왜 악인가? 그것은 인간을 결정적으로 수단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인간 복제를 금지하는 이우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목적인 인간, 하나님과 함께 유일무이한 인격체인 인간을 수단인 인간 복사품인 인간으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로 무서운 일이다.

목적으로서의 나의 탄생은 주어진 선물이고 은혜다 .남과 여가 만나 아이를 낳아도 그 두사람이 아이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의 모습을 사람이 결정한다면 그렇게 탄생한 사람은 목적이 아니다.

그 사람의 모습을 결정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목적에 이바지 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 사람의 모습을 결정한 존재가 하나님일 때에만 그는 그 자체로 목적일 수 있다. 하나님이 온전하게 사람을 수단이 아니 목적으로 삼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혜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의 모습을 결정하면 그렇게 만들어진 사람은 목적이 아니 수단이 된다. 그러므로 인간을 복제하는 것은 그 차체가 악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목적인 존재는 주어지는 선물인 것이지 결코 만들어질 수 있는 상품이 아닌 것이다. 닿는 것마다 모두 금이라면 좋겠다는 소망은 자신의 몸까지도 파멸시킬 끔찍한 망상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넷]
이처럼 인간복제는 침범 되어서는 안 될 생명나무의 영역이다. 그것은 동시에 더 이상 쌓아 올려서는 안 될 바벨탑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은 항상 너무 커졌을 때 멸망에 이른다.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다. 사람을 파멸로 이끄는 것은 언제나 사람의 교만이다. 신의 영역에 접근하는 인간의 쾌거라는 것이 사람을 멸망으로 몰아 넣으리라는 두려움이 없다면, 브레이크가 망가져 절벽 앞에서도 돌진할 수 밖에 없는 자동차와 다를 바가 없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도 전지하시다. 그러나 사람은 능력만큼 지혜롭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능력이 커질수록 자기 능력이 화를 부를까 두려워할 줄만 알아도 다행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도 사랑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능은 모두 사람에 이바지하면 사람을 구원한다.

그러나 사람은 사랑하려는 마음이 간절해도 몸이 따라주지 못한다. 그래서 능력이 주어지면 그 상당 부분을 이기심을 충족시키는데 쓰게 되다가 안팎의 파괴를 부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동안 과학 기술 문명은 인간 파괴와 자연 파괴에도 많이 쓰여진 것이 사실이다. 손의 능력을 통제할 마음의 능력이 모자란  것이다. 이른바 정신 문명이 물질 문명을 못 따라가 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술 능력은 윤리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각국에서 생명윤리위원회를 설치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자기 능력에 대한 건강한 두려움 그것이 인간 복제를 금지하려는 또 하나의 동기인 것이다.

[다섯]
지금까지 필자는 인간복제가 왜 우리 세대의 심각한 문제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필자도 이 문제에 대해서 별로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는 않았음을 고백한다. 원고 청탁을 받고서 비로소 신문을 더 찾아보고 잡지도 읽어보면서 생각할 여우를 갖게 되었다. 특히 이 글은 기독교 사상 460호에 실린 양명수의 글에 크게 빚진 것임을 부언하다.

우리는 생명의 문제에 대해서 훨씬 진지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 동안 생명에 대해서 소홀한 감이 많다.

그것은 특히 근대화의 기치 아래 경제성장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두드러진 현상인지도 모른다. 근대적인 가치는 우리가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그런 무비판적으로 숭배해서는 안 된다. 특히 생명에 대한 경시는 크게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자신의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