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냇가에 심은 나무 제11호 (2000.12)  --


- 간증 -

더 늦기 전에 다시 살리신....


이시복 안수집사



-간이식 1년을 지나면서 -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총과 주님의 은혜를 송축하오며 감사를 드립니다. 저의 쾌유를 위해 중보기도 드려주시고, 지금도 기도드리시는 목사님과 성도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목사님으로부터 "시냇가에 심은 나무"의 원고를 부탁받고 아직도 치료중이며, 시기도 이르다고 사양하였으나 순종하는 마음으로 수술전후 과정의 메모를 모아서 쓰려고 합니다.


저는 1937년 12월 16일 황해도 은율군 이도면 고현리(구월산 서쪽 황해바다쪽) 예배당이 있는 농촌마을에서 할아버지(이지양, 1885~1965, 평양신학)는 목사님, 아버지(이순구, 1916~1990 평양숭실고보, 8대독자)는 교육자이신 집안의 6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세월을 8.15해방과 6.25 한국전쟁을 치르고 여러 성상이 바뀌었습니다. 긴 세월동안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1983년 방배동 신동아 아파트로 이사 온 후 대치동의 개척교회를 등록하여 서리 집사로 임명받았으나 그저 체면치레로 주일날 예배 시간에 참석하여 축도가 끝나기도 전에 나와버리는 "한시간 교인"이었습니다. 각종 모임에 참석하려면 무슨 직분을 맡길 것 같고, 또 감당할 마음의 준비나 자신이 없어서 그냥 시계 추처럼 왔다갔다 하는 교회생활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목사님 내외분이 미국으로 장기간 떠난 사이 부모님이 속해 있었던 장로교단 교회로 가야지 하고 말도 없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 후 교회를 정하지 못하고 이교회, 저교회로 여러교회를 다녀봤으나 믿음이 없으니 마음에 들 리가 없었습니다. 이런 사정을 아신 홍오순 권사님 내외분이 우리 남도교회에 한번 나와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1993년 4월 2일 소리도 없이 출석하여 등록하고, 손님교인처럼 이름이 누군지, 어디에 사는지 모르게 주일날 예배시작 직전에 뒷자리에 살짝 들어와 앉았다가 축도 후 송영이 끝나기 전에 인사도 없이 나갔습니다. 그 후 서리집사로 임명되어 안내와 헌금위원도 하게 되었습니다.

세월은 흐르고 또 흘렀습니다. 건강에도 별 이상은 없었으며 운동이라면 축구든, 무엇이든 선수는 못되어도 흉내는 내는 편이었고, 또 좋아했습니다. 1999년 5월 교회 체육대회 후 어느날 소화가 잘 안되고, 무릎이 아프고 다리가 부어올랐습니다. 정형외과 진료를 받으니 노화로 인한 퇴행성 관절염 증상이며, 별 신통한 치료약은 없고 평생가며 물리치료가 최선이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증상이 2~3개월 계속 되어 1999년 11월 8일 내과 진찰을 받고, 초음파 검사를 한 결과 복수가 차고, 간경화가 심하며 간 왼쪽에 3cm의 희미한 그림자가 보인다고 했습니다. 청천벽력이었습니다. 복수가 차고 그림자가 보인다면 간경화나 간암이 아닌가! 아무준비도 안했는데 더 확실하게 큰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어머님 댁으로 가서 말씀드리니 아무 말씀도 못하셨습니다. 평소 어머님께서는 '고종, 이종사촌들은(4명) 다 목사가 되었는데 친손자3명중 한사람도 목사가 없으니 창피하고 너희들 믿음생활 않다가 채찍을 맞을까 두렵고 언젠가는 맞는다'고 늘 말씀하셨다.

속으로 '너 목사손자로서 너희 아버지도 신학을 포기하더니 나 죽기전에 목사는 못되어도 장로는 되게 해주시라고 기도를 드렸는데 드디어 채찍을 맞는구나'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어머님께서 성경 말씀 여호수아서 1장 9절(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을 봉독하기소 기도한 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11월 9일 삼성병원 소회기 내과 진찰을 받으니 초진결과와 비슷했습니다. 11월15일 아침 재진을 가니 즉시 입워낳여 정밀검사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검사 결과 만성 간염으로 인하여 간경화가 되고(말기) 간암 초기라고 했습니다. 나주엥 들은 바 그 당시 상황에서는 수명이 1개월 내지 6개월이라고 했습니다.

초진 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오진일수도 있겠지 하는 실날같은 희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급했습니다. 먼저 유병근 목사님께 연락드리고, 처가, 선후배, 친구 동창들에게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의료진은 최선의 방법은 간이식인데, 뇌사자의 간이식은 대기자가 많으며 순서가 와도 이식 조건들이 맞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집안 4촌이내에 제공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족 형제들과 의논하여 여동생과 아들이 입원하여 간기능 검사를 하였으며, 2명 다 정상으로 판명되어 여동생의 간을 이식하기로 결정하고, 수술날짜는 11월 16일로 잡혔습니다.

저는 아무 할 말이 없었습니다. 오빠와 아버지의 책임도 다하지 못했는데 자기 생명인 간을 제공하겠다니!

수술날짜는 다가왔습니다. 만감이 교차하고 멍청해졌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이렇게 다가오는 것인가? 수술전 내과의사는 기도 많이 하십시오라고 마지막 인사를 하고 병실문을 나갔습니다.


'아 기도의 치유! 기도의 응답밖에는 없는가보다. 본교회 ㅇ목사님과 온 성도님들이 합심해서 주야로 기도드린다고 집사람이 전하지 않는가! 장로님, 권사님, 지사님 여러분이 새벽 2,3시에 일어나셔서 간절히 기도하신다고 하시는 위로전화가 계속 걸려왔습니다. 내 기도로는 절대 안되지, 늦었지만 "더 늦기전에" 기도드리자 지난날의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다기억할 수도 없는 온갖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 드리자' 수술전후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수백번도 아마 그 이상을 외웠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지나니 마음이 안정이 되고 위안이 되며 죽을 것 같지가 않고 평상상태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한 없이 흐르는 눈물이 멀리 달아나 버렸습니다. 밥과 과일도 많이 먹었습니다. '이제는 체력을 키워서 버티어야 한다.' 의지력이 없으면 이겨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말끔이 이발도 하고 웃기도 했습니다.

드디어 11월 26일 수술일이 되었습니다. 7시 30분 여동생이 수술에 들어가 개복, 조직검사를 하니 지방간이 50%로 판명되어 이식을 할 수 없다고 하여 담낭과 담석을 제거하고 봉합했습니다.

11월 28일 아들이 다시 입원하고 11월 30일 7시 30분 유목사님이 기도해주신후 아들이 먼저 수술실로 들어가고 30분 후에 저도 수술실로 들어갔습니다. 아들의 간조직을 검사한 결과 이상이 없어 70%의 간을 이식하는 16시간의 긴 수술을 받고 중환자실로 이동하여 치료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중환자실에서 깨어보니 온 몸에 튜브와 주사줄이 20여개나 매달려 있었습니다. 꼼짝도 못했습니다. 대소변을 간호사들이 받아냈습니다. 일주일 후 7층 병실(무균실)로 이동해 치료받고 결과가 좋아 12월 23일 퇴원하여 통원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 2000년 1월 14일 혈액검사결과 간이식에 거부반응이 일어나 재입원하여 간조직 검사를 하고 중환자실로 다시 내려가 고단위 면역 억제제 주사를 맞고 병실로 올라와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 후 2월 9일에는 체한 것처럼 물만 마셔도 자꾸만 토했습니다. 운동부족과 체력저하로 장이 움직이지 않아 장이 막힌 것 같다고 했습니다. 코로 위액을 계속 빼내고 12일간을 주사만 맞으며 굶으니 체중이 53kg이하로 내려갔습니다. 병원에서는 장이 막힌 상태이고 그냥 놔두면 장이 썩는다며 다시 개복술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시 수술하기는 죽기보다도 싫었습니다. 이전에는 병원이나 수술실은 나와는 상광벗는 곳이라 생각했는데...아! 사람이 이렇게 나약할 줄이야 아직도 조금 남아 있던 힘이 쭉 빠졌습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유목사님에게만 전화 드렸습니다. 2월 21일 아침 유목사님의 기도후 5시간 예정으로 수술실로 들어갔으나 50분만에 끝나고 병실로 돌아왔습니다. 다행히 장이 썩지 않고 유착(달라 붙어있음)되어 있었습니다. 일주일이 되니 가스와 배변, 배뇨가 정상을 회복되고 X-Ray와 혈액검사도 이상이 없었습니다.


1,2차수술 흉터가 가로 30cm, 세로 20cm나 되었습니다. 배 중간에 열십자로 크게 그려져 있습니다. 병실앞에 붙어있는 챠트를 보니 모든 수치가 정상이었습니다. 약 4개월간을 입원해 있으니 저염식사도 지겹고 비용도 엄청났습니다. 빨리 퇴원을 하고 싶었습니다.

드디어 2월 29일 회진시 퇴원 허락을 받고 정든(?)병실을 퇴원하여 지금은 한달에 한번식 이상 유무를 검사하고 주사를 맞으며 약을 처방받고 있습니다.

입원한지가 엊그제 같은데(1999년 11월 15일) 어느덧 일년이 지났습니다. 퇴원시 간호사들의 인사가 '다시는 들어오지 마세요'였습니다. 장기간 수고하신 의료진과 대,소변을 받아내며 성심껏 치료해 준 간호사, 보조사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이 못난 오빠와 아버지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내 놓고 간을 제공한 여동생(이연실 상명여대 교직원)과 아들(이경원, 경희대 대학원) 그리고 중환자 대기실과 세사람의 병실을 오르락 내리락 정신없이 뒷바라지한 집사람(박해자, 집사)에게 그 고마움을 다 말할 수 없으며 마음 속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지난 세월을 반추해 보면 모태신앙으로 자라고 용산 도원동교회를 잘 섬기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아! 나는 주님을 너무나 긴 세월동안 떠나 방황했습니다. "더 늦기전에"하나님의 말씀과 계명대로 믿음생활을 하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십계명을 안 지키다가 병원의 주수사항 10가지를 더하여 20계명을 지키게 되었습니다.(결행, 감기, 설사, 곰팡이균, 엘러지, 햇빛, 육회, 생선회, 술,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을 삼갈것)이전에는 일요일날 단순히 교회에 다니고, 예배하는 생황이었으나 이제는 "더 늦기전에"주일날 성수주일하고, 예배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고, 찬송과 기도를 간절하게 드리고, 헌금과 십일조를 드리는 결실맺는 믿음생활을 하도록 노력하려고 합니다.

"더 늦었으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ㅅ술하기전 마지막으로 본다고 문병왔던 친구와 동창들을 만나면 "야! 이시복 너 돈이 살렸다. 네 집사람이 살렸다. 네 아들이 살렸다. 신기하다 우리나라 의술도 선진국 수준이구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아닙니다. 나보다 결제적으로 윤택한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 여동생이나 아들의 간을 돈으로 살 수가 있다는 말인가. 가족들도 막상 이식전 각서를 쓰라면 이핑계, 저핑계로 피하는 것이 다반사고, 수술실에 들어갔다가도 겁이나서 뛰쳐 나오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또 이식을 받고자 해도 제공자나 환자의 여러 가지 상태와 감사결과들이 맞지 않아 못하고 이식을 받고도 경과가 좋지 않아 명을 달리한 분들도 많다고 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총과 온성도님들의 기도로 새생명을 얻고 죽음 직전에서 다시 거듭났습니다. 각종 검사와 수술, 치료는 사람이 다 하지만 최종적 치유와 회복 그리고 생명의 연장은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은총과 기도의 응답뿐이라고 굳게 확신합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끝으로 저의 쾨유를 위하여 중보기도해주신 목사님과 온 성도님 그리고 위로의 글을 보내주신 여러분께 깊이 머리숙여 감사드리며 그 많은 사랑과 기도의 빚을 남은 삶동안 다 갚을 수 없습니다. 더 늦기전에 새생명을 주시고 치유해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찬송드립니다. 할렐루야!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자에게 있지 아니하나이다" (예레미야 10장 2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