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냇가에 심은 나무 제3호 <1997.8> --


- 주제토론  -

복제인간을 반대하는 이유


이주향(수원대 교수)




인간은 시를 이해할 수 있는 존재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존재라고 한다. 손을 써서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인간은 그 점에서 여타의 동물과 구별된다고, 왜 그렇게 인간을 여타의 동물들과 구별 짓고자 했을까?

지구상의 어떤 존재보다도 인간이 우월하다는, 그것도 질적으로 우월하다는 인간우월주의를 확인하기 위한 의도였다면 유치하다. 그 유치한 발상은 늘 반례 앞에서 쩔쩔맨다.

침팬지도 도구를 사용하고 무기를 사용한다. 한 인류학자가 그 사실을 발견해서 보고했을 때 인간은 도구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과 다르다는 정의는 수정되어야 했다. 어떻게 수정될 것인가?

인간 이해가 목적이 아니라 인간을 다른 종과 구별시켜주는 우월한 특징을 찾는 것이 목적이라면 아마도 인간 이해는 영원히 실패하리라.

정말로 인간 이해가 인간의 존재 물음의 목적이라면 차라리 인간은 시를 이해하는 존재라고 하는 것이 보여주는 것이 있다.



언제 시가 우리 마음을 붙들까?

사실 좋다고 평가되는 시라도 그 시가 언제나 우리에게 울림을 가져 다 주는 것은 아니다. 잊을 수 없는 것, 마음속에서 폭발하려고 하는 것이 일을 때 시는 그 열정과 마주쳐 울림을 울린다. 그 열정의 대상이 자연이건, 역사건, 문화건, 사랑이건 특정한 대상과 관계를 지어주는 열정이 없이는 시도 없고 시인도 없다.

<일 포스티노>란 시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철학적인 영화다.

무지렁이 우편배달부가 세계적인 시인의 친구가 되면서 그는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된다.
“시는 시를 쓴 사람의 것이 아니라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입니다.”
일 포스티노에 따르면 인간이 개인 것은 시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란 무엇인가?

시가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이라면 시는 어느 순간 우리에게 의미를 주는 정서를 통해 세계를 만나는 것이다.
영화에서 소박한 마리오는 아름다운 섬에 살고 있었으면서도 그 섬의 아름다움을 모르고 살았다. 그런 마리오는 베아뜨리체라는 관능적인 여인을 사랑하게 되면서 자연에 눈을 돌린다.

“당신의 미소는 쿠바의 밤처럼 푸르릅니다. 무인도의 밤처럼 섬세한 당신의 웃음은 땅에서 움트는 새싹이요, 솟아오르는 물줄기며 부서지는 파도입니다.”

사랑은 여지껏 아무런 느낌도 전해주지 못했던 자연의 풍경을 나의 풍경으로 만든다. 사랑을 통해 쿠바의 밤은 푸르르게 다가오고 부서지는 파도와 움트는 새싹은 마리오를 사로잡는다.

인간이 시를 이해하는 존재라는 것은 밋밋했던 풍경을 나의 풍경으로 살아 꿈틀거리는 풍경으로 만들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일 것이다.

풍경은 내 속의 정서가 살아 숨쉴 때 내 속에서 함께 산다. 네루다와의 우정을 나누고 그 우정을 그리워하는 마리오는 파도소리에서 그리움을 든다. 아버지의 그물이 서글퍼지는 마리오는 이미 구조적인 사회문제에 분노할 줄 아는 인간이고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 속에서 처연함 아름다움을 보는 마리오는 인간을 사랑할 줄 아는 인생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풍경을 내 풍경으로 느낄 때 우리는 자연을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그때 살아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울지도 모른다. 그때의 우리가 주목하는 것을 생명이고, 끊임없이 살아 숨쉬는 생명의 속성이다.

그 생명에는 각자의 표정이 있다.
모두 다른 표정이다. 그 표정은 천박한 자본주의적 상품화를 거부하는 개성이다. 환하게 웃는 인간이 아름답다면 눈물을 지우느라 애쓰는 쓸쓸한 인간이 아름답기도 하다. 분노하는 인간이 아름답기도 하고 때로는 체념하는 인간에서 묘한 아름다움을 느껴지기도 한다.

그때 그 시절에 우연히 태어나 다른 시대가 흉내낼 수 없는 그 시대에 걸맞는 표정을 가진 인간들은 아름답다.
그런데 그 표정을 복제, 상품화해서 판매한다면?


유전자 풀이 관리해야 할 천연자원이 라는 생각에 대해

복제인간의 기술이 인류를 다시 한번 놀라게 만들고 있다. 그 놀라움이 이 과학기술에 대한 경탄이건 인류의 관점에서 죽음이 아쉬운 사람들, 예컨데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을 다시 한번 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안도감이건 인간복제의 기술은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그 물음을 심각하게 다시 묻게 만들고 있다.

무엇보다도 삶의 반복불가능성에서 나오는 진지함이 조롱되며 그 보다도 관리라는 측면에서 세계를 통제해온 인간이 마지막에 그 스스로를 관리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게 된 것이다.

그저 우리는 복제해서는 안 될 사람들, 복제해야 할 사람들을 오락의 차원에서 상상해 보고 있지만 그 오락은 뒷맛이 쓸쓸하다. 이제 공식적으로 품질관리라는 측면에서 인간을 상품화하는 길을 보았기 때문이다.

며칠 전 복제인간 이야기를 하던 한 친구가 말했다.

“가능하다면 나는 나를 복제해 놓고 싶다.”고 자기의 아이는 자기와 너무 다른데 자기를 그대로 복제할 수 있다면 또 다른 자기가 다른 시대를 한번 더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겠냐고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어찌 그 친구 하나 분일까?

사람을 복제하는 일에 대해 공개적으로 분노하는 사람들도 사적으로는 그 가능성에 대해 호기심을 가진다. 순수한 과학적 호기심이라고 말하지만 과학적 호기심이라기보다 과학 속에 갇힌 호기심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 체게 속에서 어떤 이는 주장한다.

인간의 유전자 풀은 인간 종 전체를 위한 천연자원이라고. 그렇게 보면 모든 세대들의 귀감이 될 만한 테레사나 아인슈타인 같은 위인은 복제가 허용될 뿐 아니라 권장될 것이다.

우리가 아끼고 보존해야 할 귀한 천연 자원이므로 드디어 인간이 공개적으로 품질이 되는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품질이라면 인간도 경쟁력이다.
경쟁이 되는 기준에 걸맞게 만들어내야 한다.
IQ는 얼마 정도가 좋은가? 키는 얼마 만큼 커야 할까? 과학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이 좋을까? 아니 이왕이면 과학적이고 도덕적인 슈바이처 같은 사람이 낫지 않을까?

그런데 그 사람이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나면 슈바이처 처럼 대접 받고 살까? 오지가 점점 줄어들고 의료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땅이 점점 좁아들고 있는데, 아, 그래, 그보다는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이 좋겠다.

뛰어난 과학적 두뇌 때문에 대접 받고 너무나 대접 받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별로 비도덕적인 일이 없으니까. 이런 일이 일어나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어서 안정적일까? 아무리 안정적이어도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복제인간의 탄생은 확실히 성의 개념을 바꿀 것이다. 무성생식이 가능하다면 성에서 생식은 거세된다. 생식의 성을 생각할 이유가 없어지니까 생명 탄생과 함께 다가왔던 성의 신비는 사라진다.



그렇다면 성은 또 무엇이 될까?
성의 쾌락에서 생명의 신비가 사라질 것이다. 대부분의 윤리가 성의 금기에 기대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기존의 윤리적 체계는 확실히 힘을 상실해 갈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허위의식에 가득찬 세계를 전복하는 힘이 될 수 있을까?
결코 아니다. 오히려 보다 깊게 허위의식의 골이 패일 것이다. 새로운 체계가 지향하는 세계는 고작 경쟁력 있게 태어난 복제들에 의해 경쟁력이 없는 오리지날들의 생활양식이 서러워지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원주민들이 침략자에게 밀리듯 제품의 관점에서 확실한 전사들이 그를 만든 사람들을 밀어내는 세계는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나는 어떠한 이유로도 복제인간을 허용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어떤이는 의학적인 복제의 필요성을 늘어 놓기도 한다. 난치병에 걸린 나를 살리기 위해 나와 모든 면에서 흡사해서 부작용이라곤 없는 나를 복제해서 장기를 나눠 갖게 한다는 것이다. 만일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해 나를 복제해야만 한다면 나는 차라리 사는 길을 포기하리라. 때로는 죽음이 더 자연스럽다.

무엇보다도 복제로 태어난 인간도 태어나기만 하면 인간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너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인간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옛날 사람들은 어떤 아이인지 불투명한 상태에서 아이를 낳았대, 라던가 불편하게 열 달 동안 뱃속에서 아이를 길렀대, 하면서 복제되지 않은 인간을 원시인 취급할지도 모른다. 더구나 품질관리, 디자인의 원리가 제대로 되어서 머리좋고 잘생기게 태어난 복제인간이 권력을 잡을 가능성이 더욱 높은데.

미래에 태어날 사람들의 인물을 고르고 성격을 고르고 머리를 고를 수 있는 그 기술은 또 한번의 자본을 축적할 기회일는지 모른다. 사실 그것이 자본 축적의 기회가 아니어도 그렇게 현실적으로 논의될 수 있을까?

그러나 그 세계는 모든 것을 변화시킬 것이다. 성에서 생명이 거세되고, 만남의 설레임은 태고의 시간 속에 갇히고, 마침내 인간에서 생명의 신비가 사라질 것이다.

인위적으로 조작되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예수들로, 공자들로, 아인슈타인들로 가득 찬다면 그 세상은 천국일까?
그보다도 살 맛나지 않는 세상이 아닐까?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예수들과 공자들로 가득찬 그 세상보다는 집착 같은 사랑도 있고 치열한 싸움도 있는 소돔과 고모라 같은 이 세상을 선택하리라. 지금 이 세상이 정돈된 세상이라고는 말 못해도 의미 있는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미래를 안다는 것은 저주다.
미래를 아지 못하기 때문에 희망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부질없는 것이라도 희망이 있을 때 삶에의 의지는 콱콱 생동감 있게 움직인다.

아이를 가진 여자와 여자의 남자가 마구에 태어날 아기를 상상하면서 뿌듯해 하는 모습은 따뜻하다. 행여 잘못되지 않기를 기도하는 마음부터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아이일 거라는 믿음까지, 그 설레는 반복 속에서 뱃속의 아이를 내내 쓸고 만지는 엄마와 아빠의 손길은 어떤 성직자의 기도보다도 성스럽다.

그런 축복 속에서 태어나고 길러진 아이가 비록 엄마, 아빠보다 못나 누추하고 초라하게 살게 되어도 아이에게 사랑을 나누며 가득 희망을 품었던 그 시절을 어찌 헛되다고 할 수 있을까?

삶은 결과보다는 과정인 것을.

기술적으로 가능해진 복제인간을 기숙적으로 포기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는 품질 차원에서 인간을 대접하고 품질차원에서 세계를 봐야 하는 그 끔찍한 세계의 감옥에서 벗어 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본 내용은 ‘철학과 현실’ 1997년 여름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