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냇가에 심은 나무 제4호 --


현대인의 영성지수와 방문화


양창삼 목사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




노래방, 전화방, 비디오방 컴퓨터 통신이 대화방, 각종 인터넷 웹 사이트 등 우리 사회에 방문화가 폭넓게 확산되고 있다.

"방"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비디오나 스트레스를 풀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방"은 그 퇴폐화 가능성 때문에 주목을 받고 있다. 과거에 여러 형태의 방들이 도덕적 타락의 주념이 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스나 로마는 매우 스토익(금욕적)하게 출발했다.

그러나 에피큐리언(관능적)으로 되어가면서 역사의 장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우리가 쌓아놓은 문화적 업적이나 개개인의 신앙이 퇴폐문화로 인해 그 기초부터 흔들린다면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크리스천은 언제 어디서나 사회적 퇴폐를 방지하는 소금이 되어야 한다.



사회의 전반적인 풍토

현대인은 왜 좁고 칙칙한 밀실로 몰려드는가? 우선은 사회의 전반적인 풍토를 이유로 들 수 있다. 건전한 놀이문화를 누릴 수 있는 공간이나 여유가 부족한 현실과, 모든 것을 상업적인 거래로 단순화시켜 시간과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짜릿한 밀실문화를 살 수 있다는 생각을 낳은 사회 전반적인 풍토가 문제이다.

현대인, 특히 신세대들은 경제성(Economy), 흥분과 열정(Excit-ing), 유흥(Entertain-ment) 등의 3E를 실생활에 적용하면서 살아간다고 한다. 방문화도 이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부담없는 돈으로 즐길 수 있고, 혼자서든 같이든 그 안에서 짜릿함과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 교육마저 에듀테인먼트(Edutain-ment)로 바뀌고, 강단의 설교도 시어테인먼트(Theotainment)로 바뀌고 있다. 이것은 우리 삶이 얼마만큼 재미를 추구하고, 유흥의 늪에 빠져 있는가를 보여준다.



"방으로 오시오"

또한 대부분의 방들은 그 나름대로 유혹거리를 가지고 있다.

첫째, 밀실은 은밀함이 보장되어 있는 공간이다.
모든 간섭으로부터 차단되고, 상업적으로 제공되는 모든 것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는 은밀함이 자신의 어떤 행동도 보장받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정신분석에 따르면 사람은 은밀성, 익명성을 선호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밀실을 찾는 사람은 나만의 공간에서 자유와 해방감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 공간에 들어서면 방종과 호기가 발동하고, 마음이 흐트러지며 씀씀이가 헤퍼진다.

그러나 우리는 그속에서 영성이 무너지는 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다. 밀실이 주는 자유와 해방감은 참된 것이 아니다. 그 안에 들어서는 순간 하나님이 주신 양심은 자신의 무습에 역겨움을 느끼도록 만든다. 내가 이런 곳에 꼭있어야 하는가 반문하게 한다. 그러나 내면의 대답을 기다릴 사이도 없이 밀실이 제공하는 상업화된 제의에 자신을 맡기는 경우가 태반이다.

둘째, 밀실문화는 비록 짧지만 쾌감을 준다.
사람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쾌락을 증대시키고 고통을 감소시키려는 행동원칙을 준수한다. 의식론에서 보면 이는 쾌락주의(Hedonism)이고, 무의식론에서 보면 본능주의이다. 의식적 쾌락주의는 비교적 합리적이고 도적적 면에서 합당한 쾌감을 추구한다.

그러나 본능은 그것을 가리지 않는다. 무료함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일이나 대인관계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풀어줄 수 있다면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오히려 본능적 해결책을 은근히 기
대한다. 밀실이 주는 짧은 쾌락은 대부분 이러한 본능에 접근화한 것들이다.



밀실을 지배하고 있는 이동의 권세

무엇보다 방들은 영적으로 어둠의 권세가 삼킬 자를 찾고 있는 곳이다. 방에서 제공되는 것은 대부분 유혹 그 자체이며, 그 달콤함이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것들을 앗아간다.

내 안에 하나님의 영이 가득차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음침한 생각, 헛된 욕구가 먼저 넓게 자리를 잡게 된다. 그것의 반복은 하나님과의 거리를 넓혀주며 결국 믿음의 침체를 가져온다.

우리의 대화에서 밀실의 일들이 자주 거론되고 예배를 드릴 때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쾌재를 부를 쪽은 사탄뿐이다. 따라서 유형이든 무형이든 신앙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에 대해 과감히 발을 끊는 단호함이 필요하
다.

만일 우리가 밀실이 주는 호기심과 재미에 탐닉하고 있다면 자신의 영적상태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또한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약한가를 보여준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때로는 넘어진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그런 병적인 상태에서 믿음으로 자신을 일으키는 용기가 필요하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한다. 성령님은 사탄의 궤계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방 앞에 서 있는 크리스천에게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한다. 나아가 인간관계는 상업적 거래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격적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의 죄성을 유발하는 불건전한 방문화보다 건전한 놀이나 운동, 대화를 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이것 또한 지나치게 탐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운동이 좋다고 목사가 늘 운동에만 매달려 있다면 하나님과 교인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믿음을 신장시켜 크리스천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 외에 그 어떤 것에 대한 지나친 탐닉은 신앙 생활을 손상시킬 위험성을 안고 있다.

또한 우리 주위에는 자주 찾아야 할 "좋은 방"이 있음을 기억하라. 기도를 위한 골방, 가난하고 병든 이웃을 위한 심방이 그것이다. 크리스천이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은 하나님과 만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의 이웃에게 직접 전하는 일이다.

크리스천은 이 일을 하기에 바쁜 사람들이 불건전한 방들을 찾아 기웃거리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좋지 않다. 철학자 벨그송은 시간을 의미있게 사용하라고 했다. 학자들은 의미없이 보내는 시간을 가리켜 뉴턴타임(Newton Time)이라 부르고, 의미있게 사용되는 시간을 가리켜 벨그송타임(Ber-gson time)이라 부른다.

크리스천은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허락한 금 같은 시간을 뉴턴타임이 아니라 벨그송타임으로 사용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