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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 받은 자답게 (4)"


성경 본문

마태복음 10장 34∼39절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설교 요약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이후 힘써야 할 부분은 예수를 닮는 일입니다. 예수를 닮는 일에 가장 힘든 것을 오늘 설교하려고 합니다.


1.양보나 타협의 화평이 아닌 검(칼)을 가지신 주님을 본받아야 합니다.(34)

주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사 9:5)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평화를 주시러 오시지 않고 검을 주러 왔다고 하십니다. 칼은 전쟁, 분쟁, 자르는 것에 사용이 되어집니다. 주님이 강조하시는 평화는 투쟁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죄의 세력과 싸워야 합니다. 죄를 도려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제거해야 할 죄를 덮어두고는 참 평화를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를 의사가 환부를 칼로 도려내듯이 하여야 합니다.

기독교의 십자는 곧은 십자입니다. 불교의 십자는 굽은 만자입니다. 불교는 때와 장소에 따라서 타협이 있을지언정 기독교는 타협이나 양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전하여지는 곳에는 진리 면에서 분쟁이 일어납니다. 죄와의 싸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칼같은 자세로 사셨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단호하셨고, 죄를 범한 자들에 대하여 십자가로 대처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오늘 우리에게 그 칼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칼 같은 자세가 있습니까? 단호하며, 철저하며 진리에 대하여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태도가 분명하여야 합니다. 거룩한 고집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향한 영적 정조심이 있어야 합니다. 마귀의 유혹에 칼 같이 대항을 하여야 합니다.


2.불신앙적인 사랑을 버리고 신앙적인 최고의 사랑을 지닌 주님을 닮읍시다.(35~37)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가족간에도 분쟁이 일어납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믿지 않는 자는 마귀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충돌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조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와 악령의 인도를 받는 자가 동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적과의 동침이며 한 지붕 아래 두 가족입니다. 영적으로 대적자인 것입니다.

또 가족을 사랑을 하되 주님 보다 더 사랑하면 아니됩니다. 집이나 전토, 즉 재산을 소유하되 주님보다 더 아끼면 아니됩니다.(막 10:29, 눅 14:26)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제일로 사랑하십니까? 아내나 남편보다 부모나 자식보다, 어떤 재물보다 더 사랑을 하십니까? 주기철목사님은 순교시에 80노모와 젊은 아내와 어린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가족을 주님보다 더 사랑을 하셨다면 순교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을 금하신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효도를 강조합니다. 부부사랑, 자녀사랑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최고로 사랑을 하는데서 가족사랑이 완성됩니다.


3.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신 주님을 닮아야 합니다.(38)

십자가는 로마의 사형틀입니다. 사형을 선고받은 죄수의 몸에 지워서 형장을 가게 하여 자신이 메고 온 그 십자가 형틀에 매달아 죽입니다. 십자가는 수치와 모욕의 형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주님은 얼마 후 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실 분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만인의 죄를 담당하시는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속의 십자가를 질 수 있거나 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각기 주어진‘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목사나 장로가 진 십자가, 집사나 평신도가 지는 십자가가 다 다릅니다.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지는 십자가가 다릅니다. 모두에게 주어진 십자가가 있습니다. 힘들고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십자가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형수는 이미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대한 의욕이나 꿈을 다 겪었습니다.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귀에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성도들도 이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죽음은 그것으로 끝이 납니까? 아닙니다. 십자가를 잘 지신 주님을 하나님이 높이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내 몫에 태인 십자가 잘 지고 갑시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