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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한 은사를 사모하라"


성경 본문

고린도전서 14장 1~5절


1.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설교 요약

지난 주일은 성령 강림 주일이었습니다. 성령이 오심은 우리에게 신령한 것들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신령한 것이란 육체에서 나오는 것들과 반대되는 것들입니다. 육신과 성령은 소로의 소욕을 거스린다고 성경은 교훈합니다.(갈 6:16,18) 예수님은 마음은 원이나 육신이 약하다고 제자들을 책망하신 적이 있습니다 .또 범죄한 가인에게 하나님은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니 그것을 다스리지 못함을 책망하였습니다.(창4:7)

이렇게 육신 즉 우리의 몸은 잘 관리하지 않으며 신령한 것을 얻지 못합니다. 요즘 같이 몸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때에 영혼에 대한 관심과 건강에 대한 자세가 약할 수 밖에 없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고 하였다.(14.1)



1. 신령한 것이 무엇입니까? (14:1, 12:1, 13:1)

1) 오늘 본문 14:1이하에서는 신령한 것, 두가지를 소개합니다. 그것은 방언과 예언입니다. 방언은 성령의 은사 중에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을 갖는 은사입니다. 바울은 이 은사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또 자신이 방언을 하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을 하며, 남보다 만이  방언을 하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깁니다.(5,18)

그러나 방언은 한 개인이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언을 더 많이 하도록 권합니다. 왜냐하면 예언은 사람에게 알아듣도록 하여 덕을 세우기 때문입니다.(3) 잘 깨달은 다섯마디가 일만 마디의 방언보다 귀하다고 합니다.(19) 예언은 사람들의 속에 숨은 일들을 들추어내어 교정을 해줍니다.(25) 그래서 예언을 하기를 사모하라고 하였습니다.(39) 예언은 신령한 겁입니다. 사모합시다.


2) 고전 12장에는 신령한 것들에 대하여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하였습니다.(12:) 12장이 말하는 신령한 것들은 성령의 은사, 직임, 역사들입니다.(12:4-6) 그리고 이런 은사를 좀더 구체적으로 소개하기를 지혜, 지식의 은사를 비롯하여 믿음, 병 고치는 것, 능력을 행하는 것, 예언, 영분별, 방언, 방언통역 등입니다. 이런 신령한 것들을 소유하여야 할 이유는 주니므이 몸인 교회를 온전하게 세우려고 합입니다.


3) 고전 13장은 성도가 반드시 사모하여야 할 것을 소개합니다.(12:31) 그것은 사랑입니다. 13장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사랑장이라고 합니다.3절~13절까지는 사랑의 특성들과 사랑의 우수함을 소개합니다. 12장에서 말하는 여러 은사들도 소중하지만 그 바탕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령한 것의 제일인 사랑을 사모합시다. 사모함은 간절히 목말라하는 것입니다.



2. 신령한 것을 사모함에 소극적인 현대교인들!

일반적인 성도들이 간절하게 사모하는 것들은 주로 육신적인 것들을 우선합니다. 육신적인 것의 갈망은 이방종교나 우상섬기는 자들의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신령한 것을 구하여야 함에도 소극적입니다. 우리 주님은 썩는 양식(육신 양식)보다 영생하는 양식(영혼중심)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면 다른 것은 육신의 것은 다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육신만을 먹이라고 신령한 것에는 영양실조가 된다면 영적으로 성숙한 성도가 되지를 못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흙으로 돌아갈 존재들입니다. 그라나 우리의 영혼은 사람들은 그 정과 육을 십자가에 못박은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이 육신을 주를 위하여 내어 놓읍시다. 자신의 부요를 정리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다 베풀고 청빈한 삶을 살았던 프랜시스는 이런 기도를 드림으로 신령한 것을 사모한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시고,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주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