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起動)하며 존재하느니라”(In him, we live and move and exist. 17:28)고 하였다.

 

   우리는 의 생명”(One) 안에서 살고 있으며, 움직이는 모든 것이 의 역사(役事)”이다. 合一된 요기는 나(One)를 예배하고, 내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바가바드 기따), 일체의 사물이나 생물은 생명이신 (8식 아뢰야식*)의 현현(顯現)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여기서 주객(主客)으로 나눌 수 없는” “역동적인 순수에너지인 의 충만한 현존”(Immanul)을 체험할 때 만물의 조화를 찬양하며, 낙관적(樂觀的)이 된다.

   “모든 것이 바탕이 넓은 (부처) 그 자체”(無所不在, 139:7-10)임으로 쉬움도 없고 어려움의 분별이 없으며, “내면의 변화”(회개)로써 흐리던 눈이 밝아질 때 이것을 자각할 수 있다(1:15). 절대 하나님(One)을 상대적으로 대상화 한 교리는 하나님에 대한 ego적인 인간의 왜곡된 개념이며, 전체로서 하나(One)인 하나님은 하늘에서 복과 벌을 내리는 절대 군주의 인간과 같은 속성”(神人同形論, 50:21)의 객관적인 타자가 아니다.

   음()과 양()이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생각과 다른 하나님”(55:8)은 초월적이면서도 동시에 내재적이며, 인격적이면서 비인격적인 한 분”(One, 23:9)이므로 엑크하르트(Eckhart)과 나와의 사이에는 어떠한 간격도 없다고 하였다. 우주를 오직 하나(One)인 하나님(생명)의 활동공간으로 보는 일원론적(一元論的)인 세계관은 본체와 현실을 하나(One)로 보는 체용일원(體用一元)인 양명학(陽明學)”의 세계관과 같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은 마음()의 분류를 5전식(前識, ····), 6(정신), 7(말라식), 8(아뢰야식)으로 분류한다. “아뢰야식”(여래장)은 실재(不生不滅)와 현상(生滅)의 두 측면을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상태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즉 일체의 현상을 하나(One)로 포섭하고, 또한 이들을 모두 지어낸다. 無明의 작용(···, ego)이 사라지면 참된 자리이며, 깨침의 자리”(佛性, 法身)인 아뢰야식(阿賴耶識, One)이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가 수행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열반)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은 원래 하나님과 내가 하나(One)이고, 망령된 헛생각(ego)을 비우면, 아뢰야식의 참모습(true Self)이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