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님 詩의 제목인 "무한하신 분"은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자 니라”(I am who I am,)라고 하신 하나님이 아닙니까?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름을 직접 말하시지 않은 의미는 老子의 주장(道可道 非常道)과 같이 시공간을 벗어나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하나님은 인간의 말이나 글로써 그리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러한 궁극적 실재인 하나님을 노장(老莊)문화에서의 만물의 시원이자 종말로서 근본원리인 道, 우파니샤드문화 즉 브라만 문화는 브라만, 불교문화에서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이나 법신(法神), 성리학에서는 태극과 이(理)와 기(氣)로서 설명하고 있기에, 기독교는 이와같은 동양의 문화로부터 하나님(One)의 개념에 도움이 되는 무엇을 찾아야 되지 않을 까요?
따라서 “어디에나 계시며”(無所不在) 초월적인 하나님은 우리들의 객관적인 대상이 될 수 없지요, 유대인들이 느끼고 있는 것과 같이 저 멀리 계신 하나님이 객체로 존재하는 인간에게 율법을 잘 지키면 복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벌을 준다는 무서운 하나님의 개념은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의 개념"(마 5:45, 18:21)과 다르기 때문에 연구해 보아야 할 문제가 아닌가요?
이러한 궁극적 실재인 하나님을 노장(老莊)문화에서의 만물의 시원이자 종말로서 근본원리인 道, 우파니샤드문화 즉 브라만 문화는 브라만, 불교문화에서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이나 법신(法神), 성리학에서는 태극과 이(理)와 기(氣)로서 설명하고 있기에, 기독교는 이와같은 동양의 문화로부터 하나님(One)의 개념에 도움이 되는 무엇을 찾아야 되지 않을 까요?
따라서 “어디에나 계시며”(無所不在) 초월적인 하나님은 우리들의 객관적인 대상이 될 수 없지요, 유대인들이 느끼고 있는 것과 같이 저 멀리 계신 하나님이 객체로 존재하는 인간에게 율법을 잘 지키면 복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벌을 준다는 무서운 하나님의 개념은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의 개념"(마 5:45, 18:21)과 다르기 때문에 연구해 보아야 할 문제가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