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이 너의 보는 앞에서 말려 올라가겠거니와, 살아 있는 분으로 인해 사는 자는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니라”(도마복음 111:1).



  하늘과 땅이 말려 올라가는 즉 이원성의 겉사람(ego)이 사라지는 거듭남으로 살아 있는 神性을 깨달은 자는 삶과 죽음을 초월한 영원한 세계’(One)를 누린다. ego를 제거하고 진리(One)를 체득하여 그리스도와 같이 된 자”(true Self, 요일 3:2)는 죽음을 보지 않는 영생을 누린다(2:20). 이러한 영생의 세계는 꿈과 그림자와 같은 일시적인 허상의 세계를 초월한 영원히 불변하는 실상의 세계’(One)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통달하여 모든 것에 걸리고 막히지 않는 자를 일러 보살*”(금강경)이라고 한다.


  우리가 쓸데없는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은 내면에 이미 온전히 갖추어져 있는 절대의 영원한 진리’(true Self) 때문이다. 이원적 생각에 얽매이게 하는 어둠인 ego를 제거하면 대립하는 듯이 보이는 것들이 저절로 하나(One)光明이 되어 일원적(一元的)인 영원한 생명(true Self)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진리의 자각에 의한 희열(喜悅)의 영적 자리가 바로 일용할 양식”(6:11)이다. 하나(One)의 생명에너지’()神性으로 이원적(二元的)인 물질주의 수렁에서 이 세상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죽음은 다만 외부에 국한된 것으로 내면의 생명은 계속 살아 있으며, 육신(ego)이 소멸되는 그날 주인으로 있던 내면의 神性은 영원한 하나님 안으로 귀일(歸一)한다. ‘나의 본래 모습’(true Self)을 자각하면 환()인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혜능대사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自性(自己本性)은 생겨남()도 없고, 없어짐()도 없고, ()도 없고, ()도 없느니라.”라고 하였다. 인도의 성자(聖者) 까비르는 자신이 죽으면 (One)을 보게 된다며, 죽음(ego)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고 하였다.



대승불교의 보살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실천을 통해 자신의 완성을 이루어가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완성시켜 정토(淨土)를 건설해간다. 육바라밀은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智慧)의 여섯 가지를 말한다. 보시는 조건 없이 기꺼이 주는 것, 지계는 계율을 잘 지켜 악을 막고 선을 행하는 것, 인욕은 박해나 곤욕을 참고 용서하는 것, 정진은 꾸준하고 용기 있게 노력하는 것, 선정은 마음을 바로 잡아 통일되고 고요한 정신 상태에 이르는 것, 지혜는 진상(眞相)을 바르게 보는 정신적 밝음이다. 따라서 생멸(生滅)을 떠난 육바라밀은 자비의 실천’(下化衆生)지혜를 추구하는’(上求菩提) 생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