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안에서 나이를 굳이 셈할 필요가 없는 자유로운 空의 세계"는 "바로 지금 여기의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눅 17:21)이며, “色이 空이고 空이 色”(色卽是空, 空卽是色)임을 보는 것으로 회개(metanoia) 즉 영안(靈眼)이 열리는 깨달음의 세계에서 일어날 수가 있지 않을 까요?
이러한 세계는 “모든 것을 같은 것으로 보는 신비(同謂之玄)”인 것이며, 보는 자와 보이는 것, 主와 客그리고 “개체와 전체의 차별이 없어지는”(物我一切) 신묘한 하나님의 나라이기에 어떤 성인은 “깨달음의 세계, 자유롭고 거칠것 없이 넓은 세계에서는 따로 이것이 거룩하다고 말할 것이 없다(廓然無聖이 佛地)”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비교되어지는 老子의 道의 경지는 "자연의 법칙에 따르게 되어(乘天地之正) 천지와 나는 함께 생겨나고, 만물은 나와 일체가 되어(天地與我幷生 而萬物與我爲一), 주관과 객관의 모든 대립과 한계를 초월하여 조화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잊고(無古今) 생사의 관념이 없는(不生不死) 무궁한 경지(以遊無窮)"라고 합니다.
따라서 老子는 ”사람이 보려는 마음“(意圖)이 없이 보면 놀랍고 신묘한 하나님의 세계인 空의 세계를 보지만 그러나 보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서 보면 色의 세계인 차별상으로 가득찬 천한 현상계를 본다: 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微 도덕경 1장)"라고 하여 영안(靈眼)이 열리는 깨달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진리안에서 나이를 굳이 셈할 필요가 없는 자유로운 空의 세계"는 "바로 지금 여기의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눅 17:21)이며, “色이 空이고 空이 色”(色卽是空, 空卽是色)임을 보는 것으로 회개(metanoia) 즉 영안(靈眼)이 열리는 깨달음의 세계에서 일어날 수가 있지 않을 까요?
이러한 세계는 “모든 것을 같은 것으로 보는 신비(同謂之玄)”인 것이며, 보는 자와 보이는 것, 主와 客그리고 “개체와 전체의 차별이 없어지는”(物我一切) 신묘한 하나님의 나라이기에 어떤 성인은 “깨달음의 세계, 자유롭고 거칠것 없이 넓은 세계에서는 따로 이것이 거룩하다고 말할 것이 없다(廓然無聖이 佛地)”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비교되어지는 老子의 道의 경지는 "자연의 법칙에 따르게 되어(乘天地之正) 천지와 나는 함께 생겨나고, 만물은 나와 일체가 되어(天地與我幷生 而萬物與我爲一), 주관과 객관의 모든 대립과 한계를 초월하여 조화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잊고(無古今) 생사의 관념이 없는(不生不死) 무궁한 경지(以遊無窮)"라고 합니다.
따라서 老子는 ”사람이 보려는 마음“(意圖)이 없이 보면 놀랍고 신묘한 하나님의 세계인 空의 세계를 보지만 그러나 보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서 보면 色의 세계인 차별상으로 가득찬 천한 현상계를 본다: 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微 도덕경 1장)"라고 하여 영안(靈眼)이 열리는 깨달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