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말씀하셨다. “덤불에서 포도를 딸 수 없고, 가시에서 무화과를 거둘 수 없느니라. 이는 이들이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이라. 선한 자는 저의 곳간에서 선한 것을 가져오지만, 악한 자는 그 마음속에 있는 저의 곳간에서 악한 것을 가져오니, 이는 그 마음에 넘쳐나는 것에서 악한 것을 가져옴이라”(도마복음 45).


  선한 사람은 선한 일을 가져오고, 나쁜 사람은 그의 마음에 가득 찬 나쁜 것들 때문에 나쁜 일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善業善果 惡業惡果, 7:21-23)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는”(6:38) 행위(因果)의 법칙은 모든 종교에서 가르친다(인연법). 세상에 우연은 없고 모든 것은 이 법칙에 따라 운행되며, 우리가 이 법칙을 이해하고 살아간다면 이대로 조화로운 세상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고통과 불행은 자신이 저지른 죄의 응보(應報)*(6:7)이며, 죄에 대한 (One)의 징벌은 아니다.


  우리는 본래 온전한 神性(One)이였지만(10:34) 오직 이원성(ego)에 빠져 고통을 받고 있다. 이러한 고통으로부터의 치유는 나는 누구인가?’를 깨닫는 내면의 변화’(회개)이다. 현대 물리학이 증명하듯이 나의 몸뚱이는 텅 빈 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One)神性(생명, 15:27)으로 가득 차 있다. 하나 됨은 모든 종교의 목적인 집착을 벗어나 영적으로 성숙하고, 윤리적으로 건강하게 거듭나는 것이며, 이원론적 사유에 의한 염려와 두려움의 구름(ego)을 소멸하고, 둘이 아닌 不二의 진리를 통한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한다.


  神性(본성, One)참된 나”(true Self)를 깨닫는 내면의 변화인 회개는 물과 성령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고”(3:16), 온전하게 되어 과 하나(One)가 되는 구원이다(5:48). 즉 이원성의 마음(ego)을 의지하여 개별적인 허상 즉 사실 실재하지 않는 것을 보는 죄(맹인)를 소멸하고, 눈을 뜸으로서 전체적인 실상을 보는 것이다(9:39, 13:16). 따라서 바울은 분별하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3:9, 4:22), 새사람의 삶*(4:24)으로, 나고 죽는(生死) 세계를 벗어나는 삶인 그리스도(One)를 옷 입으라고 하였다(3:27).



*  응보(應報)의 진리는 자신이 처한 상황은 자신이 원인이 되어 나타난 결과라는 것이며(4:23), 자신의 생각, 행위에 따라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는 것이다”(6:7, 도마복음 45). 모든 것은 조화로운 의 뜻인 행위의 업(, karma)에 의한 응보의 법칙’(內因外緣, 7:17)에 따른다. “선악의 업()에는 고락의 과보가 따르며(대승기신론), 과학적으로 신비한 힘’(energy)은 우주적인 진화 과정이다. 이번 에서 겪는 모든 일이 인과응보의 발현업(發現業)에 따라 예정된 것일 뿐임을 아는 사람은 어떤 일을 겪어도 당황하지 않는다. 따라서 불행은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이므로, 이것을 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어리석다.


새사람의 삶에 대하여 바울은 옛사람은 벗어 버리고...새사람을 입으라”(4:22-24), 임제선사(禪師)인간의 육체에 한 자리 없는 참사람이 있다”(一無位眞人)고 하였다. 여기서 옛사람(ego)을 버린 새사람과 참사람”(true Self)이 바로 영원한 神性(佛性)이며, 과 하나(One)가 되어 천국의 구원이 성취된 세계”(淸淨國土, One)이다. 이러한 대상화 할 수 없는 모든 것의 바탕인 실재야 말로 기독교가 하나님이라 부르고, 선불교가 (本來面目)이라고 부르는 하나(One)이다. 따라서 톨스토이는 유능한 주석가와 신학자들의 이원적인 설명을 모두 의심하며 부정했을 때에야 전에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