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그리스도를 설명하면서 이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1:3)고 하였다.


  육(, ego)의 역사적 예수와 神性의 그리스도는 구분될 수밖에 없지만, 과거와 미래가 없는 비인격인 임의로 부는 바람”(聖靈, 3:8)과 같은 하나(One)인 생명의 관점에선 동일할 수밖에 없다. 불교는 인간은 본래 부처이다”(本來是佛)고 하여 중생과 부처, 현실과 극락이 조금도 다르지 않는 하나(One)의 생명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不二의 진리(One)는 양변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이원적인 마음으로 이것과 저것을 헤아린다.


  예수 그리스도(true Self)는 이 세상에 태어나거나 죽을 수 없는 불생불사(不生不死)의 영원한 진리(實相)이며 생명이다(14:6). 그러나 역사적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심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無明인 비늘을 벗겨 영안(靈眼)을 뜨게 하기 위한 구원자*(9:39), 독생자*, 진리의 증언자(18:37)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는 우주적 중보자*로서 오셨다(고후 5:19).


  바울이 그의 죽으심과 같은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6:5)이라 한 것은 죽음을 통해 삶(One)을 얻는다는 것이며, 죽음은 우리를 얽매였던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로운 인간이 된다는 이원성(ego)의 죽음을 의미한다(7:6). 이렇게 죄의 법’(ego)을 제거하면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4:9)와 같이 영적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게 된다. 불경에서의 귀 있는 자’(true Self)는 장터의 아우성이 부처님의 법문이 된다.



*  협성대학교의 신학교수인 이세형은 예수란 구원자에 대한 역사적이며 인격적인 이름이며, 반면에 그리스도(One)는 초역사적인 구원의 능력에 대한 이름이므로 인간의 구원을 위한 다른 이름들과 다른 종교를 배제할 수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 세상에 중생이 한 사람이라도 남아있는 한 자기의 고통이 끝나지 않았다는 불교의 부처(One)와 이 세상에 소인이 하나라도 남아 있는 한 자신의 일이 끝나지 않았다고 한 유교의 공자(孔子, One)도 구원자이다. 따라서 구원자(구세주)자신이 영생을 얻었고 해탈을 했으며 그로 인하여 남들을 영생으로 인도하고 해탈로 인도하는 사람”(true Self)으로 정의할 수 있다.


*  독생자는 예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본래 하나님과 하나(One)된 독생자이다(14:20, 17:11,21). 전체인 진리(One)를 가리고 있는 이원성인 겉 사람(ego)을 제거한 독생자(神性)좋은 씨인 진리를 깨달은 자”(13:38)이며, 새 술에 취한자(2:13)로서 계속하여 출현하고 있다. 즉 예수의 하늘(내면)에 계신 우리아버지여”(6:9)와 내 입으로부터 마시는 자는 나와 같이 될 것이다(도마복음 108)와 같이 우리의 본성도 하나님의 독생자이다. 따라서 인간의 겉 사람(虛相, ego)을 벗어나 하나님과 하나(One)가 되어 진리의 속사람(實相, true Self)을 자각한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이며, 나를 영생의 삶으로 구제해줄 구세주이다.


*  하나님과 인간관계를 화해시키는 중보자(仲保者)”가 예수라는 주장은 다음의 구절이 인용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디전 2:5). 여기서 중보자(仲保者, 파라클레토스)는 독생자와 마찬가지로 역사적인 예수”(개체적 자아)가 아니라 時空을 초월한 우주적인 예수”(神性, One)를 의미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One) 안에서우리와 화해하심으로 하나(One)되는 것이며(고후 5:19), 매개체인 하나 됨은 모든 종교의 영성수행의 목적이다(17:21). 이러한 영성수행은 맑은 거울과 잔잔한 물과 같이 고요하고 도덕적으로 깨끗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明鏡止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