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지금까지 눈으로 보지도 못했고, 어떤 귀로 들어보지도 못했고, 손으로 만져보지도 못했으며,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을 주겠노라”(도마복음 17).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은 묵상기도, () 등과 같은 신비적 직관의 방법으로 체험하는 神性(佛性), 예수(부처) 그리고 참나()의 자리이다. 이러한 생명(One)은 기독교 신비주의자인 엑카르트와 () 프란시스”* 등 성자(聖者)들이 체험한 진리이며, 老子가 설명하는 하나()이다(도덕경 14). “하나님이 우리와 변함없이 함께 하신다”(1:23)는 신비한 체험은 보이는 것, 듣는 것 등의 분별을 버리고 ()으로 하나 될 때의 경지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는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凡所有相 皆是虛妄, 고후 4:18)라고 하였다. 예수는 비실재와 실재를 자각하지 못한 채 외적 현상만을 고집하는 제자들에게 왜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8:18)고 꾸중하셨다. 서구의 이분법적인 종교는 인간이 인식 할 수 없는 (神性, One)을 독선적으로 개념화(상대화)하여 전쟁과 불행을 자초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유무, 존재 증명 그리고 사랑의 에 대한 고통과 부조리의 이유를 묻는 신정론(神正論)**은 진리(One)에서 벗어난 것이다.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神性, )에 대하여 노자(老子)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으니 이(, 평평함)라 하고,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으니 희(, 희미함)라 하고,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 않으니 미(, 미세함)라 한다, 장자(莊子)는 팔·다리와 몸뚱이를 잊고, 총명함을 버리고, 형체를 떠나고 앎을 떠나서 크게 통함에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을 좌망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또한 공자(孔子)하나님의 덕은 성대하구나. 보고자 하여도 보이지 않으며 들으려 하여도 들리지 않되, 사물의 본체가 되어 빠뜨릴 수 없다고 하였다.


*  () 프란시스는 모든 것이 한 근원에서 나오며, 神性(佛性)이 너와 나 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에 임재 함으로 모두가 화목하여야 한다”(草木國土 悉皆成佛, 5:24)고 하였다. 양자역학도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 즉 주객은 둘이 아닌 하나이며, “의 구별된 공간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만물과 하나가 된 경지를 이사야(11:6-8)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고 묘사하였다. 엑카르트는 을 깨달은 자에게는 만물에 의 맛이 나고, 만물에서 의 모습을 본다고 하였으며, 아미타경에는 물줄기, 새들, 나무들이 모두 부처님(진리)을 노래하네라고 한다.


**  신정론(神正論)이 전능하고 선하다면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가를 설명하는 것으로 자유의지 신정론, 보상 신정론등이 있다. 이러한 이론은 과 인간, 선과 악을 나누는 이원성을 전제함으로, 나누어 질 수 없는 즉 둘이 아닌 (One, 12:32)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사실 에 대한 이론인 신학은 있을 수 없는 것은 은 이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을 알려면 예수와 부처의 경지와 같이 ego를 소멸하고 과 하나가 되는 깨달음(거듭남) 외의 학문적인 증명으로 가능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마하르쉬는 외부의 , 악과 고통은 허상으로 진리의 깨달음으로 꿈과 같이 사라지며 행위의 열매는 의 법칙에 따라 거두어진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