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말씀하셨다. “건축가들이 거부한 돌을 나에게 보이라. 그것이 모퉁이의 머릿돌이니라.”(도마복음 66장)

공관복음서에서는 포도원 주인이 자기 아들을 죽인 소작인들에게 찾아가 그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의 소작료를 제때에 바칠 다른 농부에게 포도원을 넘겨준다. 그 이유를 예수는 구약 시편(118:22)에 나오는구절을 인용해 밝힌다(마 21:40-43; 막 12:9-11; 눅 20:15-18). 또한 악한 소작인들은 유대인들이고, 버린 돌은 죽임을 당한 예수로 결국은 그가 부활하여 인류를 구원하는 머릿 돌이 되신다는 의미로 새긴다. 그러나 도마복음은 구약을 인용하는 차원이 아닌 ‘실재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뿐이다’(all in all, 골 3:11)고 하는 하나의 진리를 선포하고 있다.

위 구절은  예수  자신의  미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장자莊子의 바가지  비유’와 같이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 버린  돌과  모퉁이  돌의 구분’(ego)을 벗어난 하나의 진리, 상보(相補)의 진리를 설명한다. 비록 분별 망상으로 고통을 일으키는 ‘버린 돌’(번뇌)일지라도 둘이 아닌 진리의 자리에 서 보면 ‘모퉁이의 머릿 돌’(깨달음)이 된다는 뜻이다( 번뇌즉보리). 사람들은 영원한 진리인 예수 (본성)가 내면에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지만(포도원의 농부 비유, 마 21:33), ‘자각한 자’(One)는 이원론적 사유를 벗어나 온갖 재난과 병고病苦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비이원적인 자신의 본성(참나, One)을 찾는 것 이 ‘영지주의 복음서’*이다. 무지無知란 “몸이 곧 나다”고 하는 자부심이다. 그 자부심을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신을 얻는 것이고,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야 말로 신을 아는 것이다. 신을 안다는 것은 모든 종교의 근원인 참나(그리스도)로 안주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거부한 돌인 자신의 무지함(제한성)을 깊이 인식함으로서 머릿 돌이며 전체성인 ‘우주의 실상’(眞如, One)을 깨달은 자( true Self)는 어떤  충격에도  동요하지  않고, 고요함을  유지하면서도  무한한  능력을 가진다.

소승불교는 연기성(緣起性)을 바탕으로 “모든 것은 유동하며, 어느 것 하나 고정된 실체가 없다”(諸法空)고 보지만, 대승불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하나(One)인 공(Emptiness )이 전체성(보편성)이며 질서와 조화의 궁극적 작인(作因)으로 개재해 있다고 본다(眞空妙有). 마찬가지로 양자물리학에서 물질의 동적인 성질은 아원자 입자들의 파동성의 결과로서 나타난다고 증명하고 있다. 즉, 우주는 역동적으로 상호 연관되어 있으며, 실로 짜인 직물처럼 조화롭게 상호 작용하는 불가분(不可分)한 것으로 내 안에 이미 엮여있다(바가바드 기따). 

예수는 “보지 못하는 자를 보게 하려 함이라”(요 9:39)고 말씀하셨다. ‘볼 수 없는 자 ’(ego)는 온 우주가 불행으로 가득 찬 어둠뿐이라고 여기지만, ‘ 볼 수 있 는 자 ’(One )는 어둠(거부한 돌)이 바로 밝고 밝은 광명(머릿 돌)이라는 것을 안다(諸法實相). 우리는 고통과 슬픔의 상대적인 이 세상을 바로 볼 때 실체가 없는 꿈이라는 것과 온 우주에는 본래 신비한 천국(생명)이 가득 차 있다는 둘이 아닌 절대적인 공(空) 의 세계를 깨달아야 한다(眞空妙有)

*  영지주의 복음서는 1945년 이집트에서 발견되었으며, 분별심이 사라진 ‘직관적인 앎’(깨달음)을 ‘지식의 빛’(고후 4:6), 즉 영지(靈知, gnosis)라 하고, 모든 존재가 하나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하나(One)의 진리는 불교의 “부처를 생각하면… 부처와 하나가 된다”(능엄경) 는 것과 우파니샤드의 궁극적 실재인 브라흐만(梵)과 개아(個我)가 하나라는 범아일여(梵 我一如)와 같다. 유교의 하늘과 사람이 하나라는 천인합일(중용), 장자莊子의 일체 대상과 마주하는 주체 사이에 구별이 없다는 물아일체(物我一體), 천부경과 동학의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의 사상과 통한다. 이와 같이 서양은 신과 인간이 이원적 종속 관계라면 동양은 비이원적 일체 관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