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말씀하셨다. “천국은 자기 밭에 보물이 묻힌 것을 모르고 그 밭을 가지고 있던 사람과 같으니, 저가 죽으면서 그 밭을 자기 아들에게 물려 주었느니라. 그 아들은 보물이 묻힌 것을 모르고, 자기가 유산으로 받은 밭을 팔았더라. 그 밭을 산 자가 밭을 갈다가 그 보물을 찾았더라. 저는 그 돈을 누구에게나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 주었느니라.”(도마복음 109장).


  마태(13:44)는 보화를 발견한 사람의 욕심과 속임수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도마는 모든 사람 속에 숨겨진 영적 보물인 본성(참나)이 우리의 내면에 있지만(고전3:9 )이를 찾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반면에 진리를 찾아 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진리를 발견한 사람은 편재하는 천국을 자각하여 그 가르침을 원하는 모든 이에게 영적인 부요를 나누어준다. 구원은 밭을 산 자와 같이 삶과 죽음의 이원성인 거짓 나(ego)를 버리고 숨겨진 하나의 진리(근원)인 참나(神性)를 찾는 것이다(마16:25). 그러므로 예수 는“네보물(One)이 있는 그곳에 ‘네마음’(true Self)도 있느니라”(마 6:21)고 하였고, “누스(true Self)가 있는곳에 보물이 있도다”(마리아복음 10:16)라고 말씀하셨다 . 


  구원은 맹목적인 믿음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마 7:21). 신과 자신의 본성을 모르던 죄에서 벗어나 마음밭에 이미 있는 본성(성령)을 찾아 신과 하나(One) 되는 ‘절대의 즐거움’(寂滅樂)이다(마 16 :25). 이러한 불이不二의 진리는 마치 목걸이를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여인과 같다. 안개와 같은 육체(허상)인 ‘거짓 나’(ego)를 ‘진실한 참나’(실상)와 동일시(無知)하지 않으면, 지금 여기에서 하나인 생명(천국)이 바로 드러난다. 불경佛經에서도“만약 마니보주와 같은 보물을 얻으려면 가죽 주머니같은 이 몸뚱이를 버려야한다”고 한다. 


  신성(천국)은 선택하며, 분별하는 이원성인 에고ego를 버리고, ‘지켜보는 눈’(靈眼, 눅 10: 23)*이 열려 창조주와 피조물, 이 세상과 저 세상, 천사와 마귀 등이 둘이 아니라 ‘하나의 진리(생명)’임을 인식할 때 지금 여기서 실현된다(막 12:32). 불교는 ‘부처의 눈’(佛眼)이 열려 불성(참나)을 깨달은 사람에게 이 세상은 열반涅槃인 극락(천국)이며, 현상(ego )과 실재(One) 사이에는 인식적 차이가 있을 뿐, 존재론적 차이는 없다고 한다. 이율곡은“그 묻혀있는 무한한 보물(참나)을 발굴한다면, 모두 자신의 소유가 될 것이다”(聖學輯要)라고 하였다. 



* ‘지켜보는 눈’은 당신이 보는 것을 보는 눈인 높은 안목의 영적인 눈(靈眼, 佛眼)이다. 이러한 사물의 실상(One)을 보는 ‘주시자’ 상태에 부단히 머무르는 수행에 의하여 에고ego의 뿌리를 소멸할 수 있다.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천국을 보지 못하는 자들이 보고, 이른바 스스로 본다는 자들을 보지 못하게 하며’(요 9:39),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하여(요17:26) 영안靈眼으로 형상이 없는 천국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안을 노자는 ‘보아도 안보이는 이夷’(도덕경 14장)로서 표현한다. 우파니샤드는 ‘같은 나무에 함께 앉아있는 두 마리의 새’를 설명하고 있다. 즉, 에고ego와 보편적 참나(One)이다. 전자는 경험자이고, 후자는 무관심한 주시자注視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