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와 바로 조화하기 위해서는, 오직 둘 아님만을 말하라.”

 

  ‘진리와 하나’(One)되어 피차 막힘없이 통하고자 한다면 不二의 자리’(절대세계)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不二의 진리는 남이 곧 나이고 내가 바로 남이 되는 하나(One)인데, 둘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일시적인 꿈과 같은 중생의 마음’(ego)이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ego)이 분명히 둘로 나누어져 있지만 영원한 진리의 자리에서는 둘이 아닌 하나(One)의 자리가 되며, 이러한 하나(One)인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바로 조화롭게 된다.


  용수(龍樹)는 진리를 관조하는 공관(空觀)을 설명하는 팔불중도(八不中道)에서 둘이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不一亦不異)고 주장하였고, 육조단경에서는 번뇌(煩惱)가 곧 보리(菩提)”라고 하였다. 깨치지 못한 중생의 견해’(ego)로 보면 번뇌와 깨달음의 주체인 보리(菩提)가 다른 것이지만, 깨달은 입장에서 보면 하나(One)’이므로 차별이 없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