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이 예수께 이르기를, 하나님 나라는 어떠할지 저희에게 말씀해주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것은 겨자씨와 같으니 모든 씨들 중 지극히 작은 것이다. 그러나 살아 움직이는 땅에 떨어 질 때, 그것은 큰 나무를 만들며 하늘의 새들을 위한 보금자리가 된다”(도마복음 20).



   

천국이 겨자씨처럼 작다는 것은 “집착과 욕심”(ego) 속에 숨어서 미미하게 존재하는 神性(true Self)의 존재를 말하며, 이것을 깨닫게 되면 만물을 길러주는 하늘이 된다. 즉  神은 가장 작은 겨자씨이지만 “神의 나타남인 우주”(One)는 광대무변할 뿐만 아니라 위대한 조화와 질서가 있다. “내면의 겨자씨”(true Self)를 자각함으로 “하나(One)”가 되는 것은 “내면의 변화인 깨달음”을 통하여 주관과 객관, 인간과 자연을 분별하는 ego가 소멸되는 것이다. 이러한 “無爲의 상태”(悠悠自適: One)의 삶은 그 자체가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


   이러한 진리(One)의 회복은 따라가지도 등지지도 않는 분별심(無明)을 초월한 사랑이 넘치는 “새로운 피조물”(true Self)로 태어나는 것이다. “진리와 하나(One)”가 된 보편적인 예수 그리스도는 “내가 온 것은 물질(육체)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靈)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고 말씀하셨다. 즉 우리도 이원적(二元的)인 “옛 사람”(小我: ego)을 죽여서 時空의 한계를 벗어날 때 “새 사람”(大我)인 “본성(true Self)”이 이끄는 대로 살게 되어 풍성한 생명, 새롭고 더욱 더 큰 “생명으로의 부활*”을 누린다.


   힌두교의 경전인 우파니샤드에서는 “내 속에 있는 영(靈)인 아트만(Atman)은 쌀알보다도, 보리알보다도, 작은 겨자씨보다도, 조보다도, 껍질을 깐 좁쌀 한 알보다도 더 작도다. 또 나의 중심 속에 있는 이 아트만(Atman)은 땅보다, 대공보다, 천상보다 혹은 이 모든 것을 합한 것보다 더 크다”고 하였다. 내면에 있는 “겨자씨보다도 작은 것”(Atman)이 진리(One)의 깨달음을 통하여 이원성(二元性)인 ego의 어둠이 사라지고 “큰 나무”(true Self)가 되면, “진리의 기쁨”(法喜禪悅)과 더불어 많은 사람들에게 안식(安息)을 제공하게 된다.



* 빌립복음(61)에서 예수는 “내면의 그리스도 의식의 부활”(갈 2:20)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우리 자신을 위해 당연히 ‘부활’을 얻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육신을 벗어버릴 때 안식 속에서 발견되고 ‘중간 지대’에서 걷지 않기 위함이다”. 유대교의 신비주의인 카발라를 연구하는 김태항은 “중간 지대”를 티베트 불교의 “사람이 죽은 후에 다시 윤회하기 까지 머물게 되는 상태”(Bardo)로 해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