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10:30-37).

 

   “하나님과 우리들이 하나(One)가 되어야 하며”(17:21), “나와 남이 하나”(自他不二)無心의 작용”(無我)이 설명되어지고 있으며, “이원성의 마음을 소멸하면 전일적(全一的) 의식인 不二의 진리’(true Self)를 찾게 된다는 것이다”(16:25). 이러한 하나의 세계” (One)는 성(), 나이를 넘어선 무차별의 평등한 마음”(自他一切)이다. 이와 같이 나와 남이 둘이 아니므로”(不二) 남을 행복하게 해 주어야 자기도 행복하게 되는 것이다.

   “진리(One)의 세계에서는 주(主)와 객(客)이 나누어지는 타자(他者)란 있을 수 없으며, 時空을 초월한 전체성(All) 뿐이다. 그러나 구약에서 유대인들이 진노하고, 복수하며 타자(他者)로서의 야훼라고 부르는 개념적인 을 만든 것은 不可分의 진리(One)”를 나누는 허망한 견해이다. 또한 질투, 징벌하는 공포의 창조주(創造主) 하나님”*은 하나(One)로써 선인과 악인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푸시는 조화와 평화의 하나님이 아니다(5:45).

   엑크하르트(Eckhart)나와 너, 개체와 전체 등 이원성(二元性)의 차별심“(ego)으로 보는 자는 전체성(All)인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하나(One)존재 그 자체, 그 자체, 진리 그 자체,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초부터 하나님은 구원받을 사람들과 심판받을 사람들을 예정하였다는 이원성인 예정론의 교리”(1:5)**는 사랑자체이신 하나(One)의 하나님”(無量無邊)과 양립할 수 없는 교리이다.

 

*  “질투, 징벌하는 공포의 창조주 하나님개념과 대상(對象)이기 때문에 니체와 죽음의 신학자들은 이 죽었다고 주장하였고, 또한 (One: 23:9) 분이 아닌 이원론적인 에게 왜 이 세상에 악이 있는가?”를 계속하여 묻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니체는 예수에게는 죄, , 심판과 같은 관념이 없었으며, 하나님과 인간과의 일체화를 자신의 즐거운 소식으로 살았다, 인도의 성자(聖者)인 라즈니쉬는 기독교인들에게 "죄의식을 가진 기독교의 옷을 벗고 참된 그리스도(One)가 되라고 하였다. 따라서 현대 신학자인 판넨베르크는 로부터의 창조는 새로운 형태가 출현하여 발전하는 계속적 창조를 통해 보완된다고 하였다.


**  하나님이 미리 예정하였다는 예정론의 교리를 만든 구절중 하나인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1:5)에서 예정으로 번역된 호리조의 의미는 하나님이 내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하고 하나님과 하나(One)가 되게 하신다는 뜻이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22:14)에서도 선택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말씀 안으로 들어와서 진리와 하나(One)가 되는 자가 적다는 것이다. 또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1:4)에서 택하사로 번역된 에클레고마이갇힌 율법(ego)에서 밖으로 불러내어 그리스도(One) 안으로 이끌어 오겠다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