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도마의 질문에 대해서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14:6-7)고 말씀하셨다.


 

   예수의 개체적 자아”(ego)가 아니라 순수생명인 절대적 자아”(true Self)이다. 나사렛 예수”*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있는”(8:58) “보편적인 진리”(I am)이다. 교리적으로 를 절대(One)가 아닌 상대적인 나로 이해함으로 구원은기독교에만 있다”**고 독선적으로 주장하지만, 보편적인 진리는 하나(One)이므로 개체는 구원자가 될 수가 없다. 본래  절대적 자아”(true Self)인 예수와 우리는 하나(神: One)”(14:20)이며, 불교적으로는 본래 우리 모두가 부처(神: true Self) 아님이 없는 것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에서 역사적인 나가 아니라 神性인 나이며, 이러한 궁극적 실재”(부처, 시바)를 믿는 다른 종교와 대화가 가능하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不二인 전체성(All)인 진리에 대한 믿음이며, “보는 것”(seeing, 10:23)인 영안(靈眼)을 열어 하나”(One: 17:21)가 되는 경지이다. 時空을 초월한 예수는 태어나거나 죽음이 없으며”(不生不滅), “오고 감이 없는”(不來不去) “한 분”(One)이므로 부활***과 재림****은 진리를 방해하는 시간성과 문자를 벗어나 영적인 내면의 사건으로 재해석 되어야 한다(6:63).


   “완전히 비운”(, 2:7) 진리자체(true Self)인 예수자기가 진리자체와 같다는 여래(如來)인 부처는 우리와 다 같이 동일한 하나(One)”이다. 맹자(孟子)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변하지 않는 본성(true Self)()”이라 하였고, 우파니샤드에서도 그대가 바로 그것(진리)이다고 하였다. 또한 동학의 해월선생은 영원한 인 나()를 향해 제상(祭床)을 차리라”(向我設位)고 하여, “모든 존재에 편재한 나라는 존재가 바로 이라고 하였다.

 

 

*  “나는 길이요..”(14:6)에서 유대 땅의 나사렛 예수만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면, 무한한 의 능력과 사랑을 한정하는 모순이 생긴다. 따라서 는 개체적인 예수가 아니라 보편적이며 時空을 초월한 예수(神性)이다. 따라서 구원은 믿는 것을 넘어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14:17)과 예수(神性)아는 것’(기노스코) 하나(One)가 되는 것”(17:3)이다. 왜냐하면 과학적으로 물질은 에너지의 진동이며, “우주는 하나(One)의 생명”(入不二法門) 神性의 빛”(One)뿐이라고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아인슈타인은 원자는 오직 하나(One)의 에너지이며, 우주는 하나(One)의 순수 생명에너지”(神性)가 지배한다고 하였다.



**   구원을 위하여 예수 외 다른 이름은 없다”(4:12)는 구절에서 예수는 역사적인 예수”(개체적 자아: ego)가 아니라 時空이 초월된 보편적인 예수”(절대: One)이므로 구원은 기독교만이라고 독단적으로 한정 지을 수가 없다(大道無門). 구원은 죄로부터가 아니라 우리가 (One)이다하나(One)의 진리”(3:20)를 모르는 無知를 제거하는 것이며(8:35), 예수는 보편적 생명이므로, 이러한 전체성(One)인 예수를 깨닫지 못하면 無知 가운데 죽는다”(8:24). 그러므로 예수가 하나(One)의 빛으로서 우주에 충만해 있는 생명의 빛”(8:12)인 것은 부처도 하나(One)의 빛으로서 생명의 무량광불(無量光佛)”인 것과 같다.



***  부활은 유한한 몸이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깨달음)이다. 따라서 “무한한 진리인 예수”(true Self)에게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가진 육체의 태어남과 죽음은 없으며(不生不滅, 8:58), 부처도 나는 태어난 일 없고 죽는 일도 없다”(涅槃經)고 하였다. “만유 안에 계시며”(3:11), “우리 안에 계신 비밀의 그리스도”(1:27)에게 육체적인 부활은 아무 의미가 없다”(6:63). 바울이 부활한 그리스도그리스도의 영()”을 거의 동의어로 사용한 이유는 부활이 영적인 의미이며,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사후에도 그의 힘과 능력(energy)”(1:29)을 계속하여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영적으로 통하였기 때문이다.



****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데전 4:15)에서 강림(재림)”파루시아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인 神性(true Self)이 내 안에 나타나는 깨달음 즉 하나(One)인 진리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2:20). 인간의 無知(ego)로 인하여 내면 깊은 곳에 神性이 잠들어 있다가 다시 깨어나는 것으로 마음 밭을 갈아엎는 것이다. “예수는 전체성(All)인 한(One) 분이며”(23:10), “지금 여기 나의 내면에 계시므로”(2:20) “재림으로 다시 올 수가 없는 하나님(神性)이다”(1:1). 또한 불교에서 여래(如來)는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므로 여래(如來: 본래의 자기 그대로 있는 자)라 일컬어진 것이다”(如來者 無所從來 亦無所去 故名如來, 金剛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