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I live, now not I, but Christ lives in me. 2:20)고 하였다.

 

   바울의 내가 사는 삶”(One)은 이원론적인 사유로 고통과 불안을 일으키는 옛사람” (ego, 4:22)의 삶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인 그리스도가 나의 최종적인 주체가 되어 활동하는 새사람의 삶”*(true Self, 4:24)이다. 바울은 육체의 나”(ego)로부터 주객으로 나누어 질 수 없는 하나(One)그리스도”(true Self)로 부활한 것이며, 옳으니 그르니 등으로 분별하는, 모든 상대가 끊어진 천(One)을 체험하였다. 구원은 육체의 ”(ego)를 제거하고, 청정무구(淸淨無垢)한 본래의 마음인 본성(神性, 佛性)을 자각하는 것이며, 기독교인이 추구하는 삶의 이상은 ego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활동”(One)으로 사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의 구원이 되는 이유는 우리도 예수와 같이 자기를 비워”(Emptiness),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함으로써 ego를 제거시키는 십자가의 길을 통해 영원한 생명”(One)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옛사람”(ego)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못 박고...그와 함께 사는”(6:6-8) 옛 자기”(ego)가 사라지고, 새로운 생명”(true Self)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 내면에 현존하는 그리스도(true Self)가 인간의 본래적 자기이고, 그 이외의 것은 ego적인 가상(假相)이다

 

   개체로서의 라는 ego의 의식이 있는 동안에는 결코 전체성(All)인 내면의 그리스도(true Self)를 알지 못한다. “내면의 영”(true Self)을 깨닫기 위해서는 생각의 흐름을 관찰하여 지금 생각하고 있는 자라고 하는 그릇된 ego의식을 깨뜨려 버려야 하며, 이 때 스스로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인식한다. 그리스도의 작용을 체험한 바울은 나에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1:21)고 고백하며, “그리스도를 옷 입어”(13:14) 하나(One)새로운 천국의 삶”(神性)으로 부활한 것이다. 따라서 신비주의자들은 그들 자신이 항상 (One) 안에 존재하며, 은 그들의 입을 빌려 말한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옛사람은 벗어 버리고...새사람을 입으라”(4:22-24)고 하여 새사람의 삶을 강조하였고, 임제선사(臨濟禪師)인간의 육체에 한 자리 없는 참사람이 있다”(一無位眞人)고 하였다. 여기서 옛사람”(ego)을 버린 새사람과 참사람이 바로 영원한 神性(佛性)이며, “과 하나(One)”가 되어 구원이 성취된 세계”(淸淨國土, One)이다. 이러한 대상화 할 수 없는 모든 것의 바탕인 실재(實在)야 말로 기독교가 하나님이라 부르고, 선불교가 (本來面目)이라고 부르는 하나(One)이다. 따라서 톨스토이는 유능한 주석가와 신학자들의 이원적인 설명을 모두 의심하며 부정했을 때에야 전에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