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 22:37)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나와 하나님 그리고 이웃”은 평등무차별한 “하나(One)의 생명”(眞我)임을 자각하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너와 나”를 나누는 이원성인 “사망의 세계”(分別智)를 소멸시키고, “모든 상대가 끊어진 자리”(One)인 “생명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다(요1서 3:14). 이러한 순수생명은 “너와 나”의 구별을 초월하는 “하나(One)인 우주적 神性”이다. 모든 종교의 궁극적 목표인 “하나(One)의 神性”*(요 17:21)을 자각하게 되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죄와 사악함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는 존재하지 않는 “거짓 나”(假我: ego)에서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갈 6:14)은 우리의 “참나”(靈: true Self)가 영원한 것임을 모르고 눈에 보이는 “허상의 세계”(ego)를 참된 것으로 아는 “거짓 나(假我)의 죄” 즉 “진리(One)에 대한 우리의 無知(ego)” 때문이다. 따라서 “너와 나”를 분별하는 “거짓 나”(ego)가 소멸되면, “천지의 생명과 동체”(萬物與我同體: One)인 참나(靈) 즉 “생명의 실상”(神性)이 저절로 드러나게 되어 풍성한 사랑과 찬양의 복된 삶을 누린다.
* 하나(One)의 神性은 모든 것들이 인연과 조건에 따라 여러 가지로 되어졌지만, 그러나 본바탕은 “둘이 아닌 것(不二)의 생명”(實相)이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을 비롯한 “일체만유는 神性(佛性)의 바다”(一切萬法 不離佛性) 위에 이루어진 파도나 거품과도 같은 것이지만, 이 바다는 하나(One)이며, 각각의 물결이 별도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하나(One)의 神性(佛性)을 깨달은 “거듭난 자”(true Self)가 고통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아무런 걱정과 미리 결정해 둔 목적지가 없이 흘러가는 구름과 같은 기쁘고 즐거운 삶을 누리기 때문이다. 즉 고통 또한 하나(One)인 神性의 일부이며, 이러한 神性은 완전하며, 조화로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