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10:17)고 말씀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3:14)*는 구절과 더불어 대속물(代贖物)**인 예수의 죽음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희생제물을 원하는 대상의 이 아니고, 영원한 예수에게는 죽음이 없으므로, 버리는 목숨은 유한 상대적인 나”(ego)이고, 얻게 되는 목숨은 무한 절대적인 나”(One)이다. 따라서 우리도 분별의 마음”(ego)을 죽이고 神性(true Self)으로 부활하여 하나님의 뜻”(One)에 따라야 한다.


   “내 목숨時空안의 그림자와 같은 환()에 지나지 않는 멸망의 생명인 개체성”(ego)이고 다시 얻기 위함의 목숨영원한 생명인 보편성”(true Self)이며, 동양적으로는 (佛性)이다.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죽음이 부활”(死卽生)하나(One)인 진리를 깨달아 유한한 죽는 몸”(ego)으로부터 벗어나 生死가 없는 무한한 神性(true Self)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따라서 권력과 결탁된 종교회의에서 나온 사도신경에서와 같은 시간의 흐름 속에 있고, 안개와 같은 부활의 몸은 결국 사라지며”(生者必滅), 헤어지는 것이다(會者定離).


   예수는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5:39)고 말씀하셨다. 즉 고통의 원인인 이원성의 겉사람”(ego)있는 그대로의 모습”(진리)으로 받아들일 때 속사람(true Self)을 깨닫고, 자유를 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one)의 진리는 무슨 물건이 따로 존재하듯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양변을 떠나서 융통자재한 경지를 표현하는 말이며, “거짓된 나”(ego)가 부정되고, 끝에 가서 남는 것은 진정한 진리인 나”(true Self)라는 것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에서 모세는 앞에 관사가 없으므로 내 안에서 하나님을 따라 가는 법, 광야(에레모스)는 내 마음안의 감각적 욕망 즉 이 세상의 자랑, 안목(眼目)의 정욕, 육신의 정욕이 사라져야 함을 비유하고 있다. 또한 뱀은 놋 뱀으로 정결함을 상징하고 깨달음의 빛을 주는 뱀이며, 인자(호 휘오스 호 안드로포스)그 사람의 그 아들로 하나님 자신을 상징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내면의 몽학선생이나 율법을 쫓아가는 깨닫지 못한 마음”(ego)을 비유하고 있다. 특히 톨스토이는 그의 저술”(성경)에서 이 구절을 너희 안에서 깨달음의 빛’(true Self)으로 살아야 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  인자가 온 것은...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다”(20:28)에서 대속물(뤼트론)이원론(ego)적 사유의 죄를 깨뜨려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은 원죄에 대한 대속이 아니라, “허망한 몸”(ego)을 죽이고 진정한 몸”(true Self)神性()으로 태어나는 영원한 진리를 전하기 위함이다(18:37). 대속에 대하여 야고보의 비밀서에서는 중재자가 필요한 자는 화()가 있다고 한다. 고대 이집트의 신비종교는 하나님과의 분열이 곧 원죄(原罪)이며, 神人의 대속적(代贖的) 죽음이나, 입문자(入門者)가 희생 동물을 죽이는 것은 입문자의 수준 낮은 동물적 본성”(ego)의 상징적 죽음과 신적 본성의 재생인 과의 합일”(One)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