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어느 때에 죽은 자들의 안식(쉼)이 있을 것이며, 언제 새로운 세상이 오리이까?” 예수께서 저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들이 기다리는 부활은 이미 와 있으나, 너희들이 이를 깨닫지 못하는도다.(도마복음 51)

  ”천국(안식)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이미 이루어져 있고,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하나 되는 신성(본성)의 자각이며,(눅 17:21). 미래의 메시아 대망사상과 부활(심판)은 부정되고 있으며,  '실재하는 것은 오직 진리(생명) 뿐이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시공간과 물질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 하지 않고 의존적(상대적)이며 실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과거는 기억의 대상이고 미래는 예상의 대상’임으로 없는 것이지만, 기하학적 시간을 벗어난 오직 영원한 지금만이 있다. 천국(구원)은 시간과 공간의 어느 장소가 아니라 꿈(egp)에서 깨어나는 무한한 본성(성령) 깨달음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에크하르트는 ‘영원한 진리를 듣는데 방해되는 것은 거짓 나(ego), 수(數) 그리고 시간이다'고 하였다.

 죽은 자의 안식(쉼)과 새로운 세상인 천국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지금 여기이며(눅 17:21), 삶과 죽음의 이원적 분별을 초월하는 ‘하나(One) 됨’(거듭남), 즉 전체성인 무위(無爲)이다(요 14:10). 구원은 지금 여기서 천국을 누리고 있다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엡 4:13)인 진리 깨달음에 달려있는 것이지(요 5:25; 고후 6:2), 미래 혹은 타자의 힘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나는 개체적인 몸이다’(허상)라고 말 할 때는 지옥에 있지만, ‘몸이 아니라 보편적인 영靈이라는 것’(실상의 마음)을 자각할 때는 천국에 있다.

  부활 (아나스타시스)은 눈으로 보이거나 죽음 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 11:25)고 한 것처럼 몸과 마음이 ‘나’라고 하는 거짓 나(ego)를 십자가에 못 박고 우주적 생명인 참나(One)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成佛). 예수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성전은 육체(ego), 사흘(삼 헤메라)은 참나,  ‘일으키리라’(에게이로)는 부활을 의미한다. 우리가 육체가 ‘나’라고 하는 ego를 죽이면 보편적인 ‘ 참나’로 부활한다는 것이다. 만물의 본질인 신성은 깨어난 자 안에 있는 충만한 생명의 광명이며(롬 1:20), 그대로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신성(불성)에 가까워질수록 이원성의 어두운 고통은 사라지고 ‘광명과 환희’(One)로 충만해진다(法喜禪悅). 

  예수와 부처는 잠의 어둠(거짓 나)에서 벗어나 어디에나 존재하는 광명(천국)을 깨닫는 부활(참나)을 가르쳤다.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부활의 논고’에서 예수는 ‘모든 분열과 속박을 피하라. 그러면 너는 이미 부활 가운데 있다...왜 지금 부활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라고 한다.  금강경에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을 일시에 제도(濟度) 하는데, 제도(濟度)하고 보니 한 중생도 제도(濟度)된 중생이 없더라”고 한다. 제도한다는 상(相)에서 벗어나 마음의 눈으로 바로 보게 되면(눅 10:23), 모든 사람이 이미 부활(영적 깨달음)을 성취 하고 있으며, 이 사바세계가 이대로 안락하고 자유로운 극락세계(실상 세계)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이 ‘마음의 세계’(실상)에 있는 무한한 것을 자각하고 긍정 하면서 뚜렷이 그리면, 현상계에 무한한 것들이 저절로 실현되고(現前 如來 地)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고 서있는 곳마다 진리가 된다(隨處 作主立處皆眞, 임제록).  온 우주에 충만한 진리(생명)를 깨닫게 되면 지금 여기에서 천국의 영광과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며, 삶과 죽음을 초월한 진정한 안식(평안)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