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는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12:25)고 말씀하셨다.

 

  생각(ego)에 의한 황폐와 스스로 서지 못하게 하는 분별은 꿈과 안개와 같은 ”(假我, ego)때문이다. 이러한 이원성의 꿈만 깨고 나면 不二의 생명”(One)안에서 둘이 아닌 하나”임 깨닫게 된다. 예수는 허상인 육체(ego)가 행복의 근원이라고 오해하는 바로 보지 못하는 자를 보게 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9:39). 이원성(ego)을 받아들이는 순간, 인간은 존재를 거짓되게 꾸미게 되어 실상인 천국(One)을 체험하지 못한다. 그러나 ego를 소멸할 때 전체로서 더없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웃고 춤추며 즐기는 삶이 된다.


  바울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One)이니라”(3:28)고 하였다. 만약 바울이 현재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면, “그리스도(One) 안에서 기독교인도, 불교인도 다 하나(One)이기에 차별이 없다고 하였을 것이다. 서로 다른 둘이라고 분쟁하면 이미 허망한 꿈(ego)을 꾸는 것이므로, 이 꿈을 깨는 ()3의 눈”(One, 13:13)을 뜨면 이원성의 분별(욕망과 분노 등)은 사라진다. 이와 같이 자신이 변하면 모든 길은 천국(One)으로 통함을 자각하게 된다.


  내면의 눈이 열려, 개체성이 소멸되는 깨달음은 물과 물결같이 원융무애(圓融無碍)영적인 세계”(One)가 되어 이 세계는 지극히 작은 가운데 가장 광대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즉 지극히 광대함 속에 가장 작은 것으로 나타나며, “한 털끝에서 한량없는 세계를 나타내고 미진 속에 앉아서 대 법륜을 굴리는 것이다”(능엄경). 모든 현상이 서로 융합하는 사사무애(事事無碍)*이며(화엄경), 또한 모든 것은 서로 반영하는 그물 매듭에 박힌 다면체(多面體)의 보석처럼 상호의존의 관계에 있는 전일성(全一性)이다(양자론).


*  사사무애(事事無碍), 즉 현상계(삶과 죽음)가 서로 걸림이 없는 법계로서, 진리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게 되는 하나(One)의 절대세계이다(11:25). 이러한 분별이 사라진 반야지혜()로 통찰할 때 만물은 본래 하나로 경험되는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진여법계(眞如法界)이며, 또한 티끌 하나도 부처님(하나님) 아닌 것이 없으므로, 일체 존재가 부처(), 우주의 실상(實相)이 바로 극락세계이다. 일체법(一切法)에 걸림이 없게 되는 것은 일체를 실상(實相)대로 보기 때문이며, 물결과 바다가 둘이 아닌 것과 같이 나와 부처()는 둘이 아닌 하나(One)이다. 이러한 경계가 이른바 일체법이 한 자리로서 성불(成佛)하는 길의 오묘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