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말씀하셨다. “너희가 너희의 모습을 볼 때, 그대들은 기뻐하지만, 그러나 그대가 처음부터 그대 안에 존재하며, 죽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그대들의 참 형상을 보게 될 때, 그대들이 얼마나 감당할 수 있겠는가?”(도마복음 84).

 

  우리는 단지 눈에 보이는 모습(거짓 나)을 거울에 비춰보고 기뻐하지만, 태어나지도 창조되지도 않은 영원한 참 형상인 참나(神性)를 보게 된다면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見性成佛, 딤전 6:16). 이러한 빛의 형상”(神性)時空을 벗어나 영원하며, 영적 체험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으로 모순 상극된 상대 차별의 세계를 떠나 전체로써 융합”(One)하는 경지이다. 그러므로 고통과 불행의 원인인 마음 밭인 자아(ego)”*를 제거하고, 움직임과 그침인 하나의 영적자아(神性)를 깨달을 때 누가 감격의 기쁨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원성인 ego를 제거하고 내면에 숨겨져 있는 영원한 비이원적 본성(本來面目)神性(佛性)을 깨닫게 되면 스스로 과 하나(One)가 되며(10:30), 또한 부처와 하나(One)*가 된다(見性成佛).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인 것과 같이 우리들도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셨다(17:21). 따라서 유한한 기복적 기도는 인간의식의 표층(ego)에 머무는 반면, “신비적 기도”(묵상, )는 보다 깊은 존재의 핵심에 파고들어 무한한 하나님과 하나 즉 ”(One)이 되게 하는 마음의 변화”(회개)를 일으키게 한다.


  有를 초월한 우주의 근원은 결코 둘일 수 없으며, 우주 전체도 서로 원융자재(圓融自在)하는 (One) 덩어리의 생명 자체인 神性이다(1:20). 이러한 모습이 없는 모습’(One)을 노자(老子)는 황홀이라 하며, “카타 우파니샤드에서는 모든 창조물의 가슴속에 깃든 神性(참나)은 무한히 작은 것보다 작고 무한히 큰 것보다 크고 밝다.”고 하였다. 공자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본성(神性)이라 이르고, 본성을 따르는 것을 길()이라 이르며, 길을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 이른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中庸)고 하였다.

 


*  아인슈타인은 마음 밭인 자아(ego)”로 알 수 있는 것은 상대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假相)이며, 진실한 모습인 실상(實相)은 아니다고 하였다. 물질계는 상대성과 이원성의 근본 원리에 따라 생성, 변화, 발전, 소멸하는 연기적(緣起的)이므로 모든 것은 실상이 아니라 하다”(諸法空). 그러나 나는 누구인가?의 질문을 통하여 구원인 근본(神性)의 회복”(15:27)으로 분별하는 마음이 걷히면 전체로서 하나(One)의 세계인 천국(극락)의 실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거듭남)이란 마음 자체가 분별을 떠난 것”(대승기신론)이기에 과 인간은 같지도 않고, 근본적으로 다르지도 않다”(不一不異)는 신관(神觀)이 성립된다.


*  부처와 하나(One)가 되는 것은 과 하나 됨”(One)이며, 예수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One) 되게 하옵소서”(17:21)라고 간절히 기도하셨다. 따라서 예수가 인간을 위한 십자가의 죽음은 인간과 이 모두 하나(One)임을 보여주기 위함이며, 불교의 참선(參禪)도 우주의 도리에 따라 집착을 벗어나는 무념(無念)으로 부처와 하나(One)’ 되기 위함이다. 이러한 하나(One)의 경지를 체험하는 자는 내 삶의 이 순간순간이 기쁨으로 떨리고 있네”(바가바드 기따)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경지는 그가 우주에 충만한 생명력(One)’의 강력한 파장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