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12:24)고 말씀하셨다.


 

   예수는 한 알의 밀과 같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이전의 생명”(ego)이 사라졌기 때문에 새롭게 영원한 천국”(One)으로 부활한 것이다. “이원성”(ego)이 죽어, ()의 껍질을 찢고 생명이 싹텄을 때 하나인 진리”(One)가 됨으로 시간 속에 영원이 창조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자기의 거짓생명”(ego)을 죽이는 자는 영원한 참된 생명”(true Self)으로 부활함으로써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One)가 되어 영생을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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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One)를 위하여 오른 눈과 오른 손”(5:29-30)부분적인 것”(ego)을 죽이면, 언어와 생각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갈 곳이 없어진 영원한 생명”(true Self)이 회복되어 두루 통하여 막히는 곳이 없게 된다(死卽生). 인도의 중세 시인인 까비르(Kabir)는 이러한 不二의 진리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글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하였으며, 나누어 질 수 없는 전체(All)인 진리는 믿음이라는 지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우리는 선()에서와 같이 한번 죽었다 다시 살아남으로써 세상이 새로운 영적인 경지”(One)인 이성을 초월한 지혜에 도달하게 하게 된다(大死一番 乾坤新). 따라서 ego를 소멸하고 새사람”(true Self)으로 태어난 자는 스피노자가 말한 것과 같이 모든 것을 영원의 차원인 하나(One)의 본질적인 자리’(實相) 즉 현상이 아니라 본체를 보아야 한다”.


   老子돌아감이 (One)의 움직임이요(道德經 40)”**라고 하여 음()과 양(), ()과 실(), ()와 비() 등 모든 것이 대칭으로 통하게 되어 있으며, 서로가 자리바꿈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음양의 조화성인(聖人)은 자기를 위하여 덕을 쌓아두지를 않는지라 있는 것으로 남을 위하되 자기를 더욱 있게 한다”(道德經 81)고 하였다.

 



시간 속에 영원이 창조되는 것은 예수가 가나의 혼인잔치”(2:1-10)에서 물을 포도주(One)로 만드신 것과 같이 지속될 수 없는 것에서 지속될 수 있는 것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주객의 차별”(有限)에서 時空을 초월한 영원(無限: One)으로의 변화와 모세의 율법에서 예수를 통한 사랑이라는 새로운 세상”(One)이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도 진리란 곧 진리가 아니므로 이를 진리라 일컫는 것이다”(金剛經)고 한다. 즉 입으로는 형상을 떠난 도리를 설명하면서 마음에 주객의 차별”(ego)이 있으면 진리가 아니지만, 마음으로 형상을 초월한 이치를 행하여 주객(主客)의 대립이 끊어지면 이를 영원한 진리(One)”라고 한다는 것이다.



* * 老子(진리)는 역동적(力動的)인 움직임이라고 한 것과 같이 과정신학(過程神學)하나(One)(진리)은 인격적이 아니라, 비인격적인 창조성으로, 변화해 가는 세계와의 영적인 교류를 통하여 生成해 가는 역동적 행위인 과정(process)에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이원성이 극복된 과정의 원리는 불교의 모든 것은 변한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과 통한다. 따라서 기독교와 불교가 진리(One) 안에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서로 대화를 나눌 때, 보다 성숙한 종교로 거듭날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 독선적으로 인간의 이성적 사유체계를 마비시킨다면 집단 최면과 다르지 않으며, 서로가 회통(會通)되지 않으면 하나(One)인 진리가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