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젖을 먹고 있는 아이들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이 젖 먹는 아이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이들과 같도다. 제자들이 그에게 말하기를, 그러면 우리가 아이들처럼 왕국에 들어가겠습니까? 예수가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둘을 하나로 만들고, 안을 바깥처럼, 바깥을 안처럼 하고, 위를 아래처럼 만들고, 그리고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만들어 남자는 더 이상 남자가 아니고 여자는 더 이상 여자가 아니게 하고, 눈이 있는 자리에 눈을, 손이 있는 자리에 손을, 발이 있는 자리에 발을, 이미지(image)가 있는 자리에 이미지(image)를 만들 때 그대들은 천국에 들어가리라”(도마복음 22).


순진한 젖 먹는 아이와 같이 안과 바깥, 남자와 여자 등의 “이원성”(ego)을 “내면의 눈”(눅 10: 23)으로 조화와 상보의 관계로 보는 마음(One)이 되어 눈을 대신할 눈을 얻을 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천국은 모든 한계를 초월하여 이원성 너머에 있으므로 분별 시비를 극복한 자가 체험할 수 있는 경지이다. 이렇게 생각에 의한 이원성(ego)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자”(true Self)는 모든 것을 “근원(One)인 하나님”으로 인식한다.


   빌립은 “세상 만물에 주어진 이름은 참으로 기만적이다”(빌립복음 10)고 하여 개념에 매이지 말고, 넘어서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개념을 벗어난 어린아이와 같이 “不二의 진리”(One)를 깨닫는 순간에 마음(ego)에 의한 절대자와 상대자, 神과 인간(자연)의 구별은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선사(禪師)들이 “이 세계가 바로 神이며, 평범한 삶이 종교이고,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이 좋은 것이다”고 한 것 같이 時空을 초월한 “하나(One)인 神”은 주객으로 나누어지는 “대상의 창조주”가 아니라, “과정(過程)속의 창조성”이다.


   천국은 미래에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선악, 지동(止動) 등의 양변적인 ego를 죽이고, 전체인 神性을 회복하는 “양극의 일치”인 “하나(One)의 경지”이다. “ego를 소멸시키는 십자가 없이는 부활이 없는 기독교”(고전 15:22)와 같이 불교도 “크게 죽어야 도리어 산다”(大死却活)고, 장자(莊子)는 “삶을 죽이는 자는 죽지 않고(殺生者不死), 삶을 살려는 자는 살지 못한다(生生者不生)고 하였으므로 모두 사즉생(死卽生)의 보편적인 진리를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