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이신 예수님”(I am One. 요 8:18)은 양극(兩極)의 필연적인 상호 보완성을
인식하시어 산상 수훈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하나 됨(One)”의 진리가 서구적인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로 서로 나누는 궁극적으로 대립관계가 아니라,
동양적인 “이것도 저것도 모두”(both-and)로서 현상적이거나 실존적으로 서로가
보충되거나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
임이요”(눅 6:20-21)의 구절들을 통하여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 까?
장로님의 "먼저된 자로서 나중되고(1) 및 (2)"의 의미를 문자적인 관점을
넘어, 거시적 관점에서 이해하면, 진리의 심오함이 엿보일 것 같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진화적 과정에는
일면 적자생존, 약육강식, 먹이사슬 등의 어떤 패턴을 보이고 있는데,
이를 전체로 보지 못하고, 이분법적 시각으로 바라보면, 강함과 약함,
높음과 낮음, 선함과 악함, 먼저와 나중 등으로 구분되지만, 하나(One)
이시며 전체(Whole)이신 하나님의 관점인 창조와 섭리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조화로운 현상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먼저된 자로서 나중되고 . . ."라는 진리를 문자주의적 수준에
서 해석한 하나의 유치한 예로, 당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생각처
럼 실컷 죄짓고 나서 죽기 직전에 세례 받으면 용서(구원)될 것이라는
웃지 못할 해석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하나이신 하나님의 차원에 더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
서는 먼저와 나중의 의미를 저급단계인 이분법적 대립관계로부터 상호
조화로 보는 진일보한 해석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를 은유적으로 표현해 본 "온전한 하나"라는 제목의
저의 시 한 수를 별도(이백여든두번째)로 올려 봤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