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신앙인이 추구하여야 궁극적인 목표는 탈집착인 "있음과 없음을 초월한 가난한 마음"(마 5:3) 즉 동양적으로는 겉사람(ego)을 죽인 무아(無我), 무심(無心), 무념(無念)으로 無과 공(空)적인 경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無와 空은 완전히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ego에 의한 이성과 추론이 비워져 나갈 때 내면에는 이분법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초월적 지혜가 풍성하게 열리게 되는 긍정적인 가득찬 "텅 빔"이라 할 수 있겠지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들이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경지"(눅 17:21)인 이러한 이분법을 초월한 "가난한 마음"을 가짐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요 10:10)이 아닐 까요?
에크하르트(Eckhart)는 주장하기를 가난한 사람은 모든 존재 너머에 있는 신적 존재를 향하여 자신의 피조물성을 뚫고 나아가는 것이며, 이 뚫고 나아감을 통해 피조물은 하느님과 하나가 되며 피조물의 신성화(deification of the creature)는 완성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임이요”(마 5:3)에서 가난이라는 의미를 서구적 기독교적 주석은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지 않는 자”(성경연구 시리즈: 강병도)라고 해석하지만, 동양적 기독교는 "ego를 장사지낸 無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이 추구하여야 궁극적인 목표는 탈집착인 "있음과 없음을 초월한 가난한 마음"(마 5:3) 즉 동양적으로는 겉사람(ego)을 죽인 무아(無我), 무심(無心), 무념(無念)으로 無과 공(空)적인 경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無와 空은 완전히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ego에 의한 이성과 추론이 비워져 나갈 때 내면에는 이분법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초월적 지혜가 풍성하게 열리게 되는 긍정적인 가득찬 "텅 빔"이라 할 수 있겠지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들이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경지"(눅 17:21)인 이러한 이분법을 초월한 "가난한 마음"을 가짐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요 10:10)이 아닐 까요?
에크하르트(Eckhart)는 주장하기를 가난한 사람은 모든 존재 너머에 있는 신적 존재를 향하여 자신의 피조물성을 뚫고 나아가는 것이며, 이 뚫고 나아감을 통해 피조물은 하느님과 하나가 되며 피조물의 신성화(deification of the creature)는 완성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임이요”(마 5:3)에서 가난이라는 의미를 서구적 기독교적 주석은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지 않는 자”(성경연구 시리즈: 강병도)라고 해석하지만, 동양적 기독교는 "ego를 장사지낸 無心"을 말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