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강조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장로님의 詩에서와 같이 양극이 조화로운 세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양극이라는 것은 서로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는 나누는 서로 대립될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며, 양극은 서로 안에 그 상대방을 함유하고 있음을 다음의 말씀에서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은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마 16:25),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 6:25), "먼저 되 자로서 나중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막 10:31)
老子는 모든 현상이 상반 대립되는 상태에서 형성된다고 인식하며, 궁극적 실재인 道의 조화성을 설명하면서 “있음과 없음은 서로 말미암아 있고 없으며 쉬움과 어려움은 서로 말미암아 쉽고 어려우며 길고 짧음은 서로 말미암아 길고 짧으며 높음과 낮음은 서로 말미암아 높고 낮으며 내는 소리와 들리는 소리는 서로 말미암아 나고 들리며 앞과 뒤는 서로 말미암아 앞서고 뒤선다(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形,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도덕경 2장)”고 하였습니다. 또한 선(善)과 불선(不善), 있음과 없음, 어려움과 쉬움, 길고 짧음 등은 모두 이 세상에서 가치 판단을 하여 궁극적 실재로서의 전체(One)를 올바르게 보지 못한 결과의 차별화한 상대적 개념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상대적인 사물과 개념은 서로 의존하며, 모순 대립하는 양쪽이 서로 진화할 수 있기에 "화(禍)속에 福이 기대어 있고, 福 속에 화(禍)가 엎드려 있다"(禍兮, 福所倚, 福兮, 禍所伏: 도덕경 58장)고 하였습니다.
장자(莊子)는 재물론(齊物論)에서 “저것은 이것과 상대되어 나오고, 이것 또한 저것에 상대되어 나온다(彼出於是 是亦因彼)”고 하였습니다. 즉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 가운데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 형성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의미로서 저것이 있기에 이것이 있고,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물은 상대적인 관계를 맺고, 또한 모든 사물은 쉼 없이 변화하며, 따라서 상대적 관계도 끊임없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깨달음을 얻은 성인(聖人)은 시비를 가리는 논쟁 속에 끼지 않으며, 주관적인 선입견을 버리고 끝없는 상대적 상황에서 빠져 나와 통달한, 무념의 마음으로 직접 사물의 본연의 모습을 관조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붓다가 가르치는 이 세상의 고통을 벗어버리고 열반에 이르는 길은 주객의 분별심을 버릴 수 있는 무념 무상인 無心의 세계인 空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 아닐 까요?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안에서 모든 사물은 상대적이며, 변화가 무질서하게 멋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조화롭게 일정한 법칙에 따르고 있음을 깨달아 “상대성을 극복하고”(破對待) 어떠한 환경 즉 좋은 일이든, 좋지 않은 일이든 “항상 그리고 범사에 기뻐하고, 감사하는”(데전 5:16, 18)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임재하고 계신 이 만물에는 음과 양이 다 들어 있으며(萬物負陰而抱陽), 사물의 변화는 바로 음양의 대립 작용으로 발생되기에 좋은 일과 좋지 않은 일 모두가 추위나 더위, 비나 바람의 변화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지요. 따라서 우리는 양극의 상대적 개념을 넘어선 영안이 열린 One의 조화로운 하나님의 나라에서 참된 행복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老子는 모든 현상이 상반 대립되는 상태에서 형성된다고 인식하며, 궁극적 실재인 道의 조화성을 설명하면서 “있음과 없음은 서로 말미암아 있고 없으며 쉬움과 어려움은 서로 말미암아 쉽고 어려우며 길고 짧음은 서로 말미암아 길고 짧으며 높음과 낮음은 서로 말미암아 높고 낮으며 내는 소리와 들리는 소리는 서로 말미암아 나고 들리며 앞과 뒤는 서로 말미암아 앞서고 뒤선다(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形,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도덕경 2장)”고 하였습니다. 또한 선(善)과 불선(不善), 있음과 없음, 어려움과 쉬움, 길고 짧음 등은 모두 이 세상에서 가치 판단을 하여 궁극적 실재로서의 전체(One)를 올바르게 보지 못한 결과의 차별화한 상대적 개념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상대적인 사물과 개념은 서로 의존하며, 모순 대립하는 양쪽이 서로 진화할 수 있기에 "화(禍)속에 福이 기대어 있고, 福 속에 화(禍)가 엎드려 있다"(禍兮, 福所倚, 福兮, 禍所伏: 도덕경 58장)고 하였습니다.
장자(莊子)는 재물론(齊物論)에서 “저것은 이것과 상대되어 나오고, 이것 또한 저것에 상대되어 나온다(彼出於是 是亦因彼)”고 하였습니다. 즉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 가운데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 형성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의미로서 저것이 있기에 이것이 있고,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물은 상대적인 관계를 맺고, 또한 모든 사물은 쉼 없이 변화하며, 따라서 상대적 관계도 끊임없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깨달음을 얻은 성인(聖人)은 시비를 가리는 논쟁 속에 끼지 않으며, 주관적인 선입견을 버리고 끝없는 상대적 상황에서 빠져 나와 통달한, 무념의 마음으로 직접 사물의 본연의 모습을 관조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붓다가 가르치는 이 세상의 고통을 벗어버리고 열반에 이르는 길은 주객의 분별심을 버릴 수 있는 무념 무상인 無心의 세계인 空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 아닐 까요?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안에서 모든 사물은 상대적이며, 변화가 무질서하게 멋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조화롭게 일정한 법칙에 따르고 있음을 깨달아 “상대성을 극복하고”(破對待) 어떠한 환경 즉 좋은 일이든, 좋지 않은 일이든 “항상 그리고 범사에 기뻐하고, 감사하는”(데전 5:16, 18)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임재하고 계신 이 만물에는 음과 양이 다 들어 있으며(萬物負陰而抱陽), 사물의 변화는 바로 음양의 대립 작용으로 발생되기에 좋은 일과 좋지 않은 일 모두가 추위나 더위, 비나 바람의 변화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지요. 따라서 우리는 양극의 상대적 개념을 넘어선 영안이 열린 One의 조화로운 하나님의 나라에서 참된 행복을 찾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