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님의 詩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저 멀리서 "세상을 심판하여"(창 18:25) 마음에 들지 않는 행위에 대하여 "잔인하게 징벌하는 무서운 하나님"(신 20:16)이 아니라 "잃었던 아들의 비유"(눅 15:11-32)에서와 같이 무한한 사랑으로 용서하시는 "내 사랑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고 있군요.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고, 기동(起動)하며(In him we live and move and exist. 행 17:28)” "계시지 않는 곳이 없기에"(all in all: 無所不在, 엡 4:6) "타자가 될 수 없는 임마누엘의 하나님"(One)을 왜 보수주의자들과 유대인들은 저 멀리계시는 전적타자(全的他者)로 믿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어지지 않아 누구엔가 가르침을 받고 싶은 심정입니다.
우리들은 임마누엘되신 하나님을 체험하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주관 대 객관(主觀 對 客觀)이라는 서양의 의식양식인 이원적인 양식을 벗어나 모든 범주를 초월한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실재 그 자체인 하나님을 동양적으로 직관하여야 되지 않을 까요?
따라서 예수회의 창시자인 이그나시우스 로욜라(Ignatius Loyla)가 "살아가는 방법 가운데 가장 으뜸 되는 것은 만물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하나님의 초내재성(超內在性)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장로님의 詩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저 멀리서 "세상을 심판하여"(창 18:25) 마음에 들지 않는 행위에 대하여 "잔인하게 징벌하는 무서운 하나님"(신 20:16)이 아니라 "잃었던 아들의 비유"(눅 15:11-32)에서와 같이 무한한 사랑으로 용서하시는 "내 사랑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고 있군요.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고, 기동(起動)하며(In him we live and move and exist. 행 17:28)” "계시지 않는 곳이 없기에"(all in all: 無所不在, 엡 4:6) "타자가 될 수 없는 임마누엘의 하나님"(One)을 왜 보수주의자들과 유대인들은 저 멀리계시는 전적타자(全的他者)로 믿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어지지 않아 누구엔가 가르침을 받고 싶은 심정입니다.
우리들은 임마누엘되신 하나님을 체험하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주관 대 객관(主觀 對 客觀)이라는 서양의 의식양식인 이원적인 양식을 벗어나 모든 범주를 초월한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실재 그 자체인 하나님을 동양적으로 직관하여야 되지 않을 까요?
따라서 예수회의 창시자인 이그나시우스 로욜라(Ignatius Loyla)가 "살아가는 방법 가운데 가장 으뜸 되는 것은 만물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하나님의 초내재성(超內在性)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