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선악과(善惡果)를 따 먹은 죄의 결과가 바로 인류가 장로님의 詩에서와 같이 "나는 선善 너는 악惡으로 끝도 가도 없이 나뉘는" 분별심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 때문에 이 세상에 고통이 시작된 것은 아닐 까요?
이것이 옳고 저것은 그르다는 분별에서 고통(시비와 다툼 등)이 생기는 것이기에, 이것을 해결하는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지요(요 18:37). 즉 우리들이 분별을 벗어나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One, 요 17:21) "진리의 깨달음으로 자유와 환희"(요 8:32)가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기 위함이라 할 수 있지 않을 까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눅 2:22)라고 하신 것은 기존의 유대교의 낡은 이분법적인 율법을 혁파하고 새로운 하나되는 사랑의 법을 전파하기 위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옳고 저것은 그르다는 분별에서 고통(시비와 다툼 등)이 생기는 것이기에, 이것을 해결하는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지요(요 18:37). 즉 우리들이 분별을 벗어나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One, 요 17:21) "진리의 깨달음으로 자유와 환희"(요 8:32)가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기 위함이라 할 수 있지 않을 까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눅 2:22)라고 하신 것은 기존의 유대교의 낡은 이분법적인 율법을 혁파하고 새로운 하나되는 사랑의 법을 전파하기 위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