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과 선의 만남"을 제목으로 한 장로님의 詩는 물질의 아원자적 단위는 양면성을 띠는 매우 추상적인 실체로서,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것들은 때때로 입자로, 때로는 파동으로 서로 연관성으로만 이해가 되어진다고 하는 현대 물리학을 설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입자와 파동을 설명하는 현대 물리학의 양자론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우리로 하여금 우주에 대해 역동적으로 전일적(全一的)이며, 유기적인 견해를 채택도록 하고 있는 것은 동양적 사상과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로님와 내가 시도하고 있는 성경의 동양적 해석은 매우 과학적이기에 대단한 긍지를 가집니다.
전 세계적으로 쇠퇴의 길로 걷고 있는 기독교를 살리는 유일 한 길은 과거의 그 시대적인 사람들이 만들어 낸 신학의 서구적 주장에 집착하는 자세를 버리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현대에 맞는 신학을 만들어야 되지 않을 까요? 이 지구상에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공룡 등 많은 동물들이 사라진 것과 같이 기독교의 신학도 시대에 따라 변화시키지 않으면 쇠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진리가 아닐까요?
입자와 파동을 설명하는 현대 물리학의 양자론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우리로 하여금 우주에 대해 역동적으로 전일적(全一的)이며, 유기적인 견해를 채택도록 하고 있는 것은 동양적 사상과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로님와 내가 시도하고 있는 성경의 동양적 해석은 매우 과학적이기에 대단한 긍지를 가집니다.
전 세계적으로 쇠퇴의 길로 걷고 있는 기독교를 살리는 유일 한 길은 과거의 그 시대적인 사람들이 만들어 낸 신학의 서구적 주장에 집착하는 자세를 버리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현대에 맞는 신학을 만들어야 되지 않을 까요? 이 지구상에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공룡 등 많은 동물들이 사라진 것과 같이 기독교의 신학도 시대에 따라 변화시키지 않으면 쇠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진리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