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산에서
글, 김 의 준 장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늦둥이 외아들을
제물로 바치려고,
토막내려고
칼을 치켜든 아버지는
제정신이 아닌 자
피조물의 속내가 알송달송하여
시험해 보려는 신이 있다면
전지전능한 창조자일 수 없는
무능한 신神
이를 순종의 실재實在인 양
덩달아 읊조리는 어리석은 자여!
내재하시고, 초월하신
온전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라
누구든지 자기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않다고 하신
예수님 말씀대로
혈육의 유한한 것에 애착을 버리고
무한한 것을 사모하라는
큰 마음을 품으라는
하나님의 뜻이니라.
"피조물의 속내가 알송달송하여 시험해 보려는 神"은 유대나라의 부족민들이 믿는 "저 멀리에 있으면서"(全的他者) 심판하는 神이지요. 그러나 이 神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우주적이며, 보편적인 우리들의 믿음의 神이 아니기에, 이에대한 것을 설명하는 이 詩는 참으로 올바른 진리를 잘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神은 "모든 곳에 계시며"(遍在 엡 4:6) 절대초월로서 시간과 공간을 벗어날 뿐만 아니라, 대상화가 되어질 수 없는 즉 自他不二로서 주객의 구별을 벗어난 영(Spirit 요 4:24)이 아닙니까?
老子는 “스스로가 근본이 되는”(自本自根, 창 3:14)는 궁극적 실재인 道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기에 기독교의 신관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도를 말할 수 있으면 그것은 불변하는 도가 아니고, 이름을 말할 수 있으면 그것은 불변하는 이름이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덕경: 1장)고 하였습니다.
그는 “말을 하지 않는 가르침의 실행”(行不言之敎)를 강조하고(不立文字), 신비의 道는 일정불변하고 영원하며 보편적이기 때문에 이 道를 말로서 주객의 정의를 내리는 것은 한계를 정하는 것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한계로서 이름을 지을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 즉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