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얼마만큼 교만해 질수 있을까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낮아지신 만큼."


양이 있었습니다.
목자가 있었지요.
양이 있었기 때문에 목자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목자가 있었기 때문에 양이 있었습니다.
목자는 자기의 기쁨을 위해 양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목자는 양을 사랑했고, 양을 돌보았습니다.
저는 최근에 이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이러한 깨달음을 하나 얻게 되었습니다.
"사랑한단다."라고 하는 말 속에는 "너를 아낀다." "너의 고통과 슬픔을 받아 들인다."
"너와 하나되길 원한다."...여러 가지가 있지만,
"너를 책임지겠다."라는 책임감이 포함된 말이란 것 말입니다.
그래서 도무지 함부로 내뱉을 수 없는 말 말입니다.

우리의 장막이 되어 주시는 사랑의 목자께서 우리에게 여러가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듣지 않음이 있습니다.
목자의 말을 듣지 않는 양은
목자가 자기에게 가진 생각이 무엇인지,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기분이 어떠한지, 무엇을 좋아하시며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양의 소리는 목자만이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 졌지요.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듣지 않습니다.

우리 여기서 아담과 하와를 논하며 "자유의지"를 끄집어 내지 말기로 합시다.
설령 그것을 주셨다 할지라도, 그것을 핑계삼을 수는 없는 것은
우리의 심판에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신앙을 위해
우리를 이끌어줄 지도자를 세우시길 기뻐하신다고 여깁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세상의 많은 목회자나 선생이나, ... 각 분야의 스승은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로 이끌어 주는 지도자를 따라야 합니다.
독초가 가득한 밭으로 인도하는 지도자를 따르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의 안녕을 도모하는,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귀한 은혜를
우리가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전하여 주는 지도자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반대의 모습이 보여집니다.

우리가 진정 신앙으로 성장하길 원한다면, 스승이 있어야 합니다. 올바른.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는지의 여부로 나타나게 되리라고 여깁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는지의 여부는
사람을 어떻게 섬기는지의 여부로 판단되어 지리라고 여깁니다.

이러한 말을 쓰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는 함께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가치있는 모습으로 지음 받았고, 우리는 우리를 지으신 그분을 위하여
그분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지음받아 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부여하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소명으로 받았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서 이 세상을 거스르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커다란 외로움입니다. 거룩한 외로움의 싸움을 우리 죽을때 까지 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립시다.

반드시 넘치는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미워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영접하여 당신의 장막에 우리를 거하게 하실 것입니다.


구약학자이며 깊은 찬양의 곡을 쓰시는 마이클 카드의 El Shaddai를 사랑이야기가 부릅니다.

항상 주의 은혜가 넘치는 청년부! 당신들은 승리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