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말씀하셨다. “재물이 많은 부자 농부가 있어, 저는 내가 돈을 투자하여 씨를 뿌리고 거두고 심어서, 나의 소출로 창고를 가득하게 하리라. 그리하면 내게는 부족한 것이 없으리라하였더라. 이렇게 준비하였거니와 그날 밤 동안 저가 죽었다.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도마복음 63)

 

  누가복음(12:20)한 부자의 비유에서 하나님이 어리석은 부자에게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을 것이다고 징벌하는 하나님(他者)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벌이란 남김없이 다 갚아야 하는 인과의 법칙이다(의법칙, 5:26). 예수는 타자(他者)로서 심판과 징벌하는 대상의 하나님을 마귀, 살인자, 거짓말쟁이, 거짓의 아비라고 하였다(8:44). 예수는 육적이며, 유한 상대적인 이원성의 한계를 가진 재물을 쌓는 자’(ego)가 영적인 무한 절대적인 비이원적 삶의 환희를 놓치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부자 농부는 마음의 그림자인 몸뚱이가 절대로 내 것이라고 할 수 없으며(色卽空), 바로 그대로 가상(假想)의 공(空)이라는 것은 모르고 있다. 또한 분별 시비(ego)를 초월하여 모든 것이 서로 일체가 되고, 융합하는 원융무애한 진공묘유(眞空妙有)의 경지인 천국의 실상을 놓치고 있다. 어리석은 부자인 농부’(ego)는 신묘한 우주의 음(天上妙音)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으며,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One)를 즐기는 평안과 행복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예수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며”(19:23), “하나님의 눈으로는 부자가 아니다”(12:21)라고 말씀하셨다. 거짓 된 분별심으로 실재하지 않는 재물(맘모나)에 집착하는 부자는 다른 사람과 분리 된 한 대상물’(ego)로 자신을 제한시키는 속박된 상태(노예)이다. 그러나 거짓된 ego(분별심)에 의한 환영(幻影)의 막 이 사라지고, ‘영안(靈眼)이 열린 자는 나와 남이 둘이 아닌 하나가 되므로 자유와 평안의 경지(One)를 누린다(自他不二). 우리는 생명(One)인 내면의 알(참나)을 둘러싸고 있는 이원성의 껍데기(거짓 나)를 부수고 밖으로 나와야 한다.


  어리석은 부자 농부처럼 미래와 세상에 집착하는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된 하나의 꿈이다(1:2). 시간에 대한 감각이란 마음의 작용에 지나지 않고 또한 공간에 대한 감각도 마음의 작용이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상상이며 꿈에 불과하다(벧후 3:8 ). 이 꿈(허상)속에서 온갖 즐거움과 괴로움이 번갈아 들지만, 집주인과 같이 도둑으로 인하여 깨어 있는 것과 같이 준비할 때에 깨달음이 일어나는 순간이 온다(24:43-44).


  우리가 (실상) 외에 있는 것이 없다는 하나의 진리를 깨닫는다고 말하는 이 순간에 탄생과 죽음, 괴로움과 즐거움은 실재하지 않는 꿈이었고, 그것이 마침내 끝났다는 이해()가 찾아온다. 현대 물리학과 아인슈타인(Einstein)이 세계에는 그 어떤 사물들도 실재하지 않는 공이며(諸法空), 다만 에너지의 진동과 상호작용들만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가 발견하지 못한 에너지의 정체성은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진리(생명)이다.


  따라서 천지우주는 오직 하나의 생명이다. 우리는 너와 나, 정신과 육체를 분별하는 육적인 ’(ego)를 소멸하고, ‘생명은 하나라는 것을 자각하여야 하며, 본질을 바로 보는 영적인 ’(神性)로서 영원한 행복과 평안을 누려야 한다. 이때 자기의 근본성품이 생명(神性, 佛性)이라는 확신을 얻게 될 것이다(本來是佛). 모두가 하나의 생명이며, 천지는 나와 더불어 뿌리가 같고 만물은 나와 더불어 유기적(有機的)인 동일한 생명체(神性)라는 것을 자각할 때 자연을 훼손시키거나, 정치 사회의 갈등과 불화 등은 사라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