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7:7)라고 말씀하셨다.

 

  ‘구하라는 세속적인 것을 구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미 여기 있는 내면의 진리(참나)를 찾으라는 것이며, 이 때 예수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다”(14: 12)라는 말씀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즉 하늘(내면의 신성)의 세계가 현상계에 실현되고 있음을 깨닫도록 기도를 하여야 한다(6:10). 엑카르트는 무엇보다 아무것도 너 자신을 위해 요구하지 말며, 으로 하여금 너를 다루고, 그의 뜻하는 대로 하라고 하였다. 이러한 기도는 존재계와 하나가 되게 하여 이 세상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진리로 거듭나게 되었을 때 이미 필요한 일체의 것들이 갖추어진 神性(참나)을 체험하게 된다. 하나(One)의 진리에서는 선과 악, 행복과 불행의 이원성(ego)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며, 모든 것이 ()의 진리 안에서 조화롭게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와 같이 과 하나(One)가 된 영적인 수준에서는 더 이상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드릴까요가 되며, 삶의 모든 사건을 통해 성장하게 된다. 즉 이 세계는 마음(ego)이 만든 환영(maya)이 아니라 하나(One)의 신비한 하나님의 세계가 된다.


  용수(龍樹)는 하나의 진리인 공관(空觀)을 설명하는 팔불중도(八不中道)의 진리’*에서 둘이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고,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는 번뇌(煩惱)가 곧 보리(菩提)라고 하였다. 즉 깨치지 못한 중생의 견해로 보면 번뇌와 깨달음의 주체인 보리(菩提)가 다른 것이지만, 깨달은 입장에서 보면 하나(One)이므로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화엄경(華嚴經)에서도 부처가 곧 중생이고 중생이 곧 부처’*라고 함으로 한 순간에 내가 부처(예수)와 하나(One)’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1:16).


*  모든 것을 부정해 버린 뒤에 도달하는 팔불중도(八不中道)의 진리()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항상(恒常)하지도 않고 단멸(斷滅)하지도 않으며, 동일(同一)되어 있음도 아니요 다름도 아니며, ()도 아니요 또한 가는 것()도 아니다”(不生不滅, 不常不㫁, 不一不異, 不來不出). 즉 공간개념· 시간개념· 수량개념· 운동개념이 없다는 중도실상이다. 이러한 하나의 진리는 주관과 객관, 인간과 자연, 조물주와 피조물 등의 이원적 분별을 초월하며(物我兩忘), 말의 종교를 넘어선 말 저편 세계인 의 자리이다(我空法空). 이와 같이 현대물리학도 관찰하는 장치와 관찰되는 대상 즉 주관과 객관의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  부처가 곧 중생이고 중생이 곧 부처라는 진리(One)는 일본의 선사(禪師) 하꾸인(白隱)이 물과 얼음의 비유로서 설명하고 있다. 즉 아무리 단단한 얼음도 녹게 되면 물이 되는 것처럼 일시적인 중생도 본래의 자기”(佛性)를 깨닫게 되면 영원한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선(, 無心)은 천지우주 만유가 바로 부처()이며, 내가 법신(神性)이 되는 참된 자유를 추구하는 수행으로 현실의 본모습(One)을 바로 보게 한다. 생멸이 없는 본성(神性)을 깨치는 선()은 부정신학, 기독교 신비주의자의 영성수행과 통하며, 절대자인 (부처)은 감각과 사유에 의한 인식을 초월함으로 영적세계의 신비적 체험에 의해서만 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