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One)이니라”(요 10:30)라고 말씀하셨다.
마태, 마가, 누가의 예수는 역사적인 존재이지만 그러나 요한의 예수는 일시적인 “육체의 나”(ego)가 아니고, “영적인 나”(true Self)로서, 존재자체(One)인 “영원한 생명”(요 1:1)이다. 이러한 “참 생명”(One)인 “나(true Self)를 따르는 자는 어둠(ego)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는다”(요 8:12). 따라서 예수는 “나를 본 자는 보내신 이 즉 진리(One)를 본 것”(요 12:45)이라고, 부처도 “나를 보는 사람은 진리(One)를 보는 것이다”고 하였다.
우리는 다양하지만 동시에 하나(One)이며, 개개의 “작은 나”인 동시에 하나의 “큰 나”이기도 하다. 장자(莊子)는 “내(true Self)가 만물과 하나가 된 것이며, 이미 하나(One)가 되었으니 말할 것이 또 있으랴”고 하여 모든 것이 神性하며, 가장 작은 풀잎이라도 가장 큰 별과 같이 모두가 하나(One)라고 하였다. 불교에서도 중생(衆生)과 자연(自然), 인간과 神, 나와 너 등 우주가 하나의 생명(One)이므로 “천지우주가 일여평등(一如平等)하다”고 한다.
“진리인 神과 하나(One)”가 된 경지는 궁극적인 환희의 자리가 된다. 이러한 “보편적인 神”(One)은 열악한 사막 풍토에서 배태된 타자(他者)로서 땅의 정복을 당연시 한 “모세의 神”과 다른, 일체의 형상과 속성을 여윈 즉 “말과 생각이 끊어진 자리”(神性)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목적은 “내면의 神性을 깨달아”(눅 17:21) “하나(One)인 神”이 되는 것이며(요 17:21), 마찬가지로 불교도 “내면의 佛性”을 깨달아 “하나(One)인 부처”가 되는 것이다.
“하나(One)가 된 예수”는 “인류의 고통”(無知)을 자기의 것으로 하였으므로 “내(true Self)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이다”(요 12:50)고 말씀할 수 있었다. 부처(true Self)도 일체 중생을 “하나(One)로 보는 자각”을 통하여 중생을 위해 활동하는 인격을 가졌다. 따라서 우리들도 묵상, 참선 등을 통하여 “겉 사람의 이원성”(ego)을 넘어서, 속사람(true Self)인 “내면의 깊은 곳인 神性”(눅 5:4)으로 뚫고 들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