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눅 6:21)라고 말씀하셨다.



   진리는 양극이 서로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로 나누는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음양(陰陽), 움직임과 멈춤”과 같이 상호 의존적이며 전체(All)라는 것이다. 모든 상황에서 그 극에 이르면 반대로의 운동이 있으며, 서로가 영향을 끼치는 우주의 균형 잡힌 리듬은 바로 그러한 상호 의존성에서 나온다. 우리는 진리(One)이신 예수가 “너는 나를 따르라”(마 8:22)고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것을 “생성과 변화”*(成住壞空)에 맡겨야 한다.


   진리(One)를 깨닫는다는 것은 “문을 열어서”(계 3:20) “우는 자와 웃는 자, '실패와 풍성함'(롬 11:12), 굶주림과 배부름 등” 모든 것은 음양의 조화와 같이 전체로써 한결같은 하나(One)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老子는 “화(禍)여, 복(福)이 너에게 기대어 있구나. 복(福)이여, 화(禍)가 네 속에 엎드려 있구나. 누가 그 끝은 알리요?(禍兮, 福所倚, 福兮, 禍所伏..: 道德經 58장)라고 하여, “세계는 하나의 유기체”(전체)임을 설명하고 있다.


   진리란 전체(All)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하며, 만약 그것이 절반이라면 그것은 거짓보다 더 위험하다. 왜냐하면 반쪽 진리는 진리가 아니면서도 진리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리(One)를 깨닫는다는 것은 모든 일에서 부분을 보지 않고 그 전체를 보는 것이다. 이러한 不二의 진리를 주역(周易)의 계사전(繫辭傳)에서는 “음(陰)과 양(陽)의 두 기운은 둥근 원(圓)을 그리며 순환의 운동을 이어간다”(一陰一陽之謂道)**고 하였다.



* “모든 만물을 섭리하시는 神”(One)은 “공중의 새를 기르고, 들의 백합화를 자라게 하며”(마 6:26), 모든 “생성의 과정을 일으키는 변화”이기에 모든 존재의 “생성과 변화”(成住壞空)의 근원(One)이 된다. 따라서 일체만유(一切萬有)가 神(佛)과 다르지 않는 불이불(不異佛)이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근원인 神”(One)에게 맡겨야 한다. 이러한 보편적인 神의 개념은 우파니샤드에서 모든 개체나 실체의 “내적 자아”인 아트만(Atman)으로 표현되고 “우주의 궁극적인 실재”인 브라만(Brahman)과 동일시되고 있다. 따라서 본질적(One)으로 인간과 神은 유대인의 주장과 같이 다른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동일한 존재의 두 가지 표현양식”(不一不二)이다.


** “음(陰)과 양(陽)의 순환 운동”(陰陽의 반대 일치)의 의미는 상승(창조)과 하강(파괴) 그리고 인간이 태어나고, 그리고 바로 그날부터 죽기 시작하는 원리인 중국의 음양도(陰陽道), 태극도형 그리고 한의학과 같이 음(陰)과 양(陽)으로 모든 것이 서로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사(生死)의 굴레를 초월하여 삶(陰)과 죽음(陽)을 한 동전의 양면으로 여기는 “진리(One)를 깨달은 자”(true Self)는 죽음을 즐기고, 춤을 추며 노래한다.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육신은 허상(虛相)이지만, 그러나 영원한 내면의 神性(佛性: true Self)은 실상(實相)이므로 죽음은 “상대적인 허상”(ego)이 “절대적인 실상”(實: One)으로 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