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작은 것은 곧 큰 것과 같으니, 상대적인 경계를 모두 끊어진다.”

 

  不二의 진리는 아무리 작아도 그대로 하나의 전체(All)이고, 아무리 큰 것이라도 그대로 하나의 전체(All)로서 상대적인 차별이나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영원한 “불성(佛性)과 하나”(One)가 되어 조금도 걸림이 없이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진리의 세계(One)에 대하여 법성게(法性偈)에서는 “작은 티끌 속에 시방세계가 다 들어가 있다”(一微塵中含十方)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의 나타나는 것이다”(롬 8:19)고 하였다.

 

  삼라만상은 인간이 깨달음을 얻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원성인 ego가 사라지고 상대적인 경계를 모두 끊어진 새로운 의식이 태어나면 필연적으로 새로운 세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경지를 요한은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고 기록하였다.

  이러한 세계를 이사야는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줄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 11:8)고 하였다. 완전히 큰 것과 작은 것에 대한 차별이 없는 고차원의 걸림없는 원융무애(圓融無碍)한 현실이 존재할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말했다. “어느 사람이 예수께서 이르되, “내 형제들에게 일러 우리 아버지의 유산을 나와 더불어 나누도록 하소서.”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제자들을 향해 이르시되, “내가  나누는 자냐?” 하시더라(도마복음 72).

 

  누가는 성경의 비슷한 구절(눅 12:13-15)에서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 하니라”고 하여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일시적인 윤리적인 교훈을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도마복음에서 예수님은 불변하며 영원한 不二의 진리를 위하여 “하나님과 하나”(One)”됨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

  여기서 나누는 자는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겉사람(ego)에 의하여 지극히 작은 것과 큰 것을 차별하는 분별심을 가진 자를 의미한다. 또한 예수님은 나누는 자가 아니라고 하신 것은 상대적인 경계를 모두 잊고 영원히 “하나님과 하나”(One, 요 17:21)가 된 것을 스스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