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거나 있지 않음이 없어서, 온 세상이 바로 눈 앞이다.”

 

  시방(十方)은 먼 곳을 말하고 목전(目前)은 가까운 곳을 말하며, 공간적으로 멀고 가까움이 서로 융합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不二의 진리는 시간만 없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으로 멀고 가까움이 서로 융합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즉 “있음도 없고 없음도 없다”는 “영원한 절대세계”(One)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해탈하여 不二의 진여세계로 들어가면 시간적으로 길고 짧음이, 공간적으로 멀고 가까움이 없어서 한 생각이 만년이고 만년이 한 생각이며,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어서 무한한 우주가 늘 눈앞에 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요 16:16, 20-22).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외적인 것에 집착한다면 不二의 진리를 볼 수 없을 것이다. ego적인 모든 집착을 버리고 時空的으로 멀고 가까움이 서로 융합되어 버리는 체험으로 영원한 진리인 “영적 새사람”(true Self)으로 탄생하면, 끝없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고통스러운 진통을 하지만 새로운 아기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에 그 진통을 잊어버리고 마는 여인의 기쁨이다.

  時空은 영혼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을 방해한다. 왜냐하면 ego적인 時空은 부분들이지만 영원한 神性(true Self)은 전체(One)이시기 때문이다. 時空을 벗어난 새사람(true Self)은 하나님과 더불어 맛보는 기쁨이요, 영원한 신적(神的)인 기쁨이기 때문에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이다. 不二의 진리인 영원한 현재의 이 기쁨으로 사후(死後)의 삶에 대한 억측을 뿌리친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했다. “언제 그 나라가 오겠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그 나라는 기다린다고 오는 것이 아니니,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성질이 아니니라. 아버지의 나라는 온 세상에 두루 퍼져 있어 사람들이 볼 수 없느니라”(도마복음 113).

 

  바울은 장래의 최후 심판 후에 펼쳐 질 하나님 나라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한다”(딤후 4:1)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이미 온 세상에 두루 퍼져 있다고 하였다.

  육체, 마음, 세상의 한계를 초월하는 천국은 물리적인 상태가 아님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감각으로 알 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바로 아는 깨달음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즉 내면에 있는 神性(true Self)을 깨달아 거듭남의 체험으로써 지금 여기에서 전체(One)인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요 3:3).

  누가(17:20-21)는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 고도 못하리니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기록하여 도마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설명 하였다. 그러므로 영안(靈眼: 佛眼)이 열린 사람에게는 모든 곳이 조화로운 하나님 나라가 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