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은 빠르지도 늦지도 않아, 한 순간이 곧 만년이다.”
시간을 초월한 근본(不二의 진리)은 무주(無住), 무념(無念), 무상(無相)이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짧거나 길지도 않다는 것이다. 즉 한 생각 이대로가 만년이며 만년 이대로가 한 생각으로 영원하다. 不二의 진리는 크고 작음의 차별과 빠르고 늦음의 차별이 없기 때문에 하나하나의 티끌 그대로가 우주 전체이며, 한 순간순간이 그대로 영원이다. 우리가 진여자성을 깨쳐서 不二의 진리를 성취하면 시간의 길고 짧음이 다 끊어진다는 것이다.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해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8-9).
영혼이 하나님을 보기를 원한다면 시간적인 것과 공간적인 것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간을 초월한 “근본 진리”(One)는 이원성(二元性)인 마음의 ego적인 생각을 초월하기 때문에 짧거나 길지도 않으며, 한 순간순간이 그대로 영원인 것이다. 즉 “하루가 천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벧후 3:8)는 영원한 현재(eternal now)이다.
전체(All)인 진리를 깨달은 “거듭난 자”(One)에게는 時空이 사라지기에 모든 것이 空한 가운데 하나님(神性: 佛性)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요 3:3). 즉 “하나가 전체”(One)인 不二의 진리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는 물리적인 세상을 초월하여 영적인 세상을 체험하며, “객관적인 의식”(objective consciousness)의 상태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먼저 된 자들 중 많은 이들이 나중 될 것이고, 그들은 하나(One)가 될 것이니라”(도마복음 4:2).
마태는 “포두원의 품꾼”들을 비유하여 설명을 하고 마지막에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6)고 하였다. 이 구절의 일반적인 해석은 “영적 자만(自慢)을 경계하기 위함이며, 역전극(逆轉劇)을 암시한다”고 한다. 이렇게 역전극(逆轉劇)으로 설명하는 것은 보편적인 진리가 아니다. “포도원의 품꾼”들의 비유는 현재가 중요한 시간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즉 먼저와 나중의 서로 나누는 분별 시비를 벗어난 영원한 不二의 진리를 깨닫게 되면 하나(One)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에 취하라」
온전함에는
빠름도 늦음도 없어
하루가 천년이요 천년이 하루 같은
영원한 세계.
먼저되고 나중됨이 없이
모든 것이 하나로 완성되는
진리의 세계라.
그것은 무한하여
육안으로는 볼 수도
분별심으로는 느낄 수도 없는
통째로 마시고 취한 자라야
알 수 있는 신비로운 그 무엇.
하나에 취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 무한에 흠뻑 젖어
하나됨의 자유를 누리는 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