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이미 이루어지지 못하는데, 하나가 어찌 있을 것인가?”
둘이라고 하거나 하나라고 하거나 분별 시비이요, 생각이다. 그러므로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며, 하나이기도 하고 둘이기도 하다고 한다. 둘이라고 하면 이미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이니 꿈만 깨고 나면 둘이라는 세계가 이루어질 수가 없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마 12:25).
생각에 의하여 황폐와 스스로 서지 못하게 하는 분별 시비 망상은 겉사람(ego)에 의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꿈만 깨고 나면 不二의 진리안에서 “둘”뿐만 아니라 “하나”라는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라는 것은 이원론의 일부가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재의 본질은 不二(advaita)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과 하나”(One)가 됨으로써 이루어 질 수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하나”(One)가 된다는 것은 “주님의 영(靈)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통해 영광에서 영광으로 ‘주님과 같은 형상’(One)으로 변화되는 것이다”(고후 3:18).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아담은 큰 능력과 큰 부요함에서 생겨났지만, 그는 가치적으로 여러분의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가 상대가 되었다면 그는 죽음을 맛보지 않았을 것입니다”(도마복음 85).
아담은 그가 선과 악을 분별하는 지식의 선악과(善惡果)의 열매를 먹기 전 까지는 영원한 빛의 자녀였던 것이다. 그러나 타락 후 분별 시비하는 그의 ego적인 삶은 우리들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생사(生死)를 초월한 不二의 진리인 절대불변하며, 영원한 참나(true Self)인 신성(神性: 佛性)을 체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는 不二의 진리인 불성(佛性)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모든 法은 그 모양이 없으므로 생겨나지도 소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으니라”(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空을 즐기는 자유」
온전한 것에는 본디
양변이 있을 수 없는데
어찌 하나인들 있으랴.
둘로 나뉜 것에는
사랑의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나니
날이면 날마다 다툼이 끊이지 않는
다름없는 지옥이라.
이것과 저것으로 나누고
분별(分別) 시비(是非)하는 세상 논리로는
진리에 다가설 수 없나니
그 허망한 꿈에서 깰지어다.
먹음직도, 보암직도
탐스럽기도 한 그 꿈에서 깨어나
영원한 생명의 열매를
먹고 즐기며 천국을 누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