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물이 없는 法에는 다른 法이 없는데, 허망하게 스스로 애착한다.”

 

  중생이 생각하고 집착하는 특별한 다른 진리(法)가 없는데 공연히 스스로 애착할 뿐이다. 無爲라는 대자유와 자박(自縛)이라는 속박이 둘이 아니니 不二의 진리에는 다른 진리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존재는 존재일 뿐이니 거기에 자기 식대로 다른 개념을 붙이지 말야 하며, 마음 밖에서 法을 구하지 말고, 마음 안에서도 法을 구하는 집착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요 14:9-10)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시간과 공간에 속하는 역사적이며 고유명사로서의 주님이 아니라, 우주적이고 보통명사로서의 만물의 근원이며 영원한 생명임을 잘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다윗의 자손으로 유대 땅에 태어나기 전에 이미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계셨기 때문에”(요 8:58) 상대적 주님으로 여겨 허망하게 스스로 애착하는 것은 不二의 진리가 아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로 나왔느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려 하느냐?  너희 왕이나 권세 있는 자처럼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를 보려 하느냐?  이런 자들은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를 보려 하느냐?  이런 자들은 부드러운 옷을 입었으되 진리를 깨닫지 못하느니라”(도마복음 78)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가서 방황하느냐”라는 질문은 하나님의 나라의 진리는 어떠한 장소에서 발견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 실현되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분법적인 겉사람(ego)에서 비(非) 이분법적인 속사람(true Self)으로 시선을 옮길 때 자신의 영원한 성품을 알게 되고 不二의 진리(One)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