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한 2주 쉬었죠?
이번주엔 곱빼기로 글을 썼습니다.
찬양대원 모두 잘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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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강조한 나머지 교회에서 음악을 이야기 할 때, 음악을 복음처럼 생각하고 적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복음인 것입니다. 이 진리는 단순히 불변함의 원리에 대한 절대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이 생명은 거룩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므에 이르게 하나니..."(롬 1:16-17).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며, 구원에 이르게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인 것입니다.

          반면 음악은 절대적 음악의 형식을 가지고 있지 않고 그렇게 될 수도 없습니다.만일 어떠한 특정한 음악의 형식을 강요한다면 이는 음악을 복음처럼 절대성을 부여하는 사고가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엄청난 양의 음악사가 말해주고 있듯이 다양한 음악을 이루어왔습니다. 인류 역사가 설명하듯이 음악은 개개의 민족의 특성에 따라 서로 어우러지면서 만들어진 문화의 소리입니다.  분명 음악은 진리와 비교될 성질이 아니며 어떤 음악이든 절대적 기준과 권위를 둘수 없는 것입니다.
         19세기 초 독일의 루터교회 회개 부흥운동(Lutheran Confessional Revival)과 함께 찬송가의 개혁과 발전을 이뤄가려던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열매 없이 끝낼 수밖에 없었던 그 때의 상황을 요한 다니엘(John Daniel)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루터의 찬송가들은 그들 나름의 발전 여지가 차단된 상황에서 4분의 4박자라는 확고한 틀에 매여 있었다. 그 코랄 찬송은 이처럼 확고하게 불려지면 불려질수록 더욱 장엄해지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었다." 독일 찬송가인 코랄(choral)에 절대성을 부여하여서 더 이상의 발전을 막은 결과를 낳았던 것입니다.
         이보다 훨씬 이전 시대엔 심지어 제네바 '성 베드로 교회' 음악 감독이었던 부르즈와(Louis Bourgeois, ca. 1510-ca.1561)가 존 칼빈의 시편찬송 노래를 좀 더 아름답게 부를 목적으로 편곡한 것이 죄명이 되어 감옥에 잡혀 들어가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칼빈의 대표적인 찬송가인 제네바 시편가(Genevan Psalter, 1542)의 공인된 음악 편집자였습니다.

         '교회의 양식'이라는 절대성을 부여할 때 음악은 그 발전을 멈추게 되고 오히려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더 나아가 음악에 어떠한 능력을 부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음악으로 인하여 영적치유도 가능하다는 생각입니다.
         문헌에 따르면 그리스 철인 탈레스(Thales, B.C. 640-546)가 음악으로 흑사병을 치료받았으며 피타고라스(Pythagoras, B.C. ca. 580-ca.500)는 정신적인 치료를 위해선 음악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강조했으며, 그리스 음악사상의 설립자로 알려진 이 피타고라스의 생각을 다시금 정립한 중세의 최고 음악 권위자이자 석학이었던 보에티우스(Boethius, ca. 480-524)sms 그의 '음악원리(De institutione musica)' 중에서 '인성의 음악(musica humana)'을 통해 음악이 인간 육체와 영혼 및 그의 각 부분들을 통제한다고 봄으로서 보다 확고한 이론적인 설명의 체계를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모든 음악적 행위는 도움의 차원이지 근본적인 치유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간 잘못 생각하면 음악에 어떠한 신비적인 힘이 있는 듯이 치유적인 차원으로 생각해서는 않됩니다. 음악에 대한 예찬론을 가졌던 마틴 루터도 "악기들은 단지 말 없는 음악만을 남져줌에 반하여 우리에게 남겨진 수많은 찬송시와 시편들은 음악과 함께 결합함으로서 듣는 자의 영혼을 감동시켜 준다"라고 함으로서 영혼의 감동은 음악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가사에 있는 것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의 능력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임합니다.
말씀을 떠난 음악은 그 정서적 언어, 감정적 움직임에 불과한 것입니다. 음악은 마음을 빨리 움직여줄 수 있는 매체의 수단이 됩니다. 이렇게 신속하게 정서를 흔들어 마음의 문을 열어줄 수 있다는 특성이 성령의 도구로서 사용될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을 경험하는 것과 음악이 마음 깊숙히 자리하여 인간의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공통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성령이 음악이 될 수 없고, 음악도 성령이 될 수 없습니다.
          음악은 인간의 정서, 심리, 물질적인 영역에서 영향력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와 차원이 다른 영적 영역에서의 직접적인 치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현대음악 치료법은 고대인들에게 처음에 주술적인 것이었던 음악을 말하는 것으로써 그리스어로 '노래하다'라는 말에 '마술로 고치다'의 의미 있는 것은 음악이 본래 주술적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들은 음악이 병을 고칠 수 있고, 마음을 정화시킬 수 있으며 기적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믿었습니다. 신, 동물, 심지어는 숲과 바위까지도 음악으로 매혹시켰다는 오르페의 신화와 리라의 명수인 암피온(제우스와 테베의 영왕인 안티오페의 아들)이 쌍둥이 형제 제투스와 함께 테베의 성벽을 쌓다가 리라를 연주하자 돌들이 저절로 움직여 성벽이 완성되었다는 신화 등이 음악의 마법적 효과를 믿는 원시적 음악관의 일례를 보여줍니다.
          고대인들은 정신병이나 간질병 같은 타악기의 반복되는 타주 소리에 맞추어 심한흥분으로 이끌려지고, 그 다음에는 깊은 수면에 빠져들면 병든 정신이 빠져나간다고 믿었습니다. 다윗의 하프 연주로 사울의 광증이 진정되고, 나팔소리에 여리고의 대리석이 부서진다는 성서 속의 이야기, 중세 동화의 무용 병 이야기나 피리부는 사나이 이야기 등 음악이 지니는 기적적인 힘에 대한 믿음은 현대 정신병학까지 계속되어 오고 있습니다. 즉, 현대의 음악치료법 등이 이 마법의 음악에서 발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치료라고 하는 것은 편안한 음악을 듣고 정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안정됨에 의하여 육신의 병까지 호전되는 과정들을 말합니다. 실제적으로 이러한 결과는 대부분의 병이 마음에서 오는 것과 같이 그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나라"(잠4:23),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17:2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진정한 치유와 강건하게 될 수 있는 길은 능력의 하나님 말씀에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잠 4:20, 22).
           그리스의 에토스이론은 음악이 인간을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사람으로 만든다고 합니다. 헤럴드 베스트는 매우 단호한 말을 합니다. "예술가들이나 음악인들로서 우리는 만들어진 것이 본래 갖지도 않는 특권을 가정하면서 지배 아래 있는 작품(handiwork)이 지배하는 것으로 바뀌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 우상 숭배의 초기단계는 예술이나 음악이 그 존재와 사용에 의해서 그 어떤 행위들을 실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에서 온다." 더불어 그는 음악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하고자 도덕적으로 상대적이며 진리의 말씀을 명확히 나타내기엔 불가능하다 전제하고 "음악은 믿음, 신악고백,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정확성, 심지어 세계관을 표현하는 역량 면에선 본질적으로 중립적이다"라고 결론지었습니다. 더구나 음악에 매우 보수적인 영국의 청교도들조차 그것을 심미적인 것, 즉 아름다움에 호소하는 소리로 보고, 음악이란 그 본질엔 신학적이거나 도덕적 요소가 섞이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경건주의에 뿌리를 둔 이들의 사고에도 음악 그자체가 중립적인 것임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음악이 가진 특징중 음악이 표현되어질 때 그 음악이 표현하고자 하는 가장어울릴 만한 소리와, 그 가사에 붙여질 가장 적절한 정서적 표현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음악들은 가사에 생명력을 불어 넣어준다"라고 말했으며 음악은 그 안에 담긴 가사와 너무나 잘 결합할 수 있는 특성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음악을 하나님의 말씀 다음으로 귀히 여겼던 마틴루터도 그가 회중찬송(choral)을 만든 목적을 "회중들을 위한 찬송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살아있게 하기 위한 것이 나의 의도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참된 부흥을 말할 때도 복음에 그 참 의미가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음악과 함께한 찬송에 대해서 "(viva vox evangelii)살아 있는 복음의 소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음악을 통한 찬양은 그 목적을 복음이 말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