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궤와 예수

 

                                                                                     글,   김 의 준  장로

 

   이천오백 년 전, 바벨론의 침공을 피해 골고다의 예레미아 동굴에 숨겼다는

이스라엘 민족의 상징인 언약궤가 이천년 전, 예수가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위

에서 흘린 피가 묻은 상태로 크리스찬 고고학자인 <론 와이어트>에 의해 몇 해  

전 발견된 사건이 요즘 와서 기독교계에 화제가 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이와 관련한 생물학적인 측면의 호기심은 세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

생각이 든다. 생물학과 거리가 먼 나로서도 몸과 분리된 피가 이천년 동안

살아 있을 수 있는지? 피가 살아 있다는 생물학적 의미는 뭔지? 그리고 남성의

염색체없는 동정녀의 염색체만의 혈흔이 자연법칙을 초월하여 성령으잉태

孕胎되었다(마,1;18)는 예수의 탄생 비밀을 뒷받침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

을 넘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러나 이 사건을 두고 성경적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질문의 범위를 가늠하기

다소 애매하지만 개개인의 신앙의 정도程度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을 것으

로 본다. 따라서 성경의 문자적 측면에서만 보면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구약 기록된 여타 내용과 예수의 말씀을 중심으로 견주어 볼 때,  모세의 언약

궤와 예수의 피의 만남이 단순한 역사적(또는 신화적) 의미를 넘어 시공을 초월

한 진리의 관점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어, 한 서

너 가지 정도의 내 개인적인 생각을 피력하고자 한다.

 

   첫째, 모세와 예수의 관계성이다. 이 사건을 모세와 예수의 관계 속에서 고찰해

볼 때, 모세와 관련한 출애기의 언약궤(출,25;10~22, 37;1~9)에 예수의 를 연결

짓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진리인 예를 바로 아는데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말해서 예수를 유한한 역사적 사건 속에 가두는 의미 말고는 무슨 가치가 있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데 대해 , 이를 단호히 부정하며(마,22;41~46,막,

12;35~37, 눅,20;41~44), 시공을 초월하여 아브라함 이전에도 있는 자(요,8;58)임

분명한 의미를 이해한다면, 예수의 정체성(본질)과 모세의 역사성과의 연

무슨 새로운 또는 특별한 의미를 갖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둘째, 예수의 피에 관한 의미이다. 유대민족의 전통적 관습 속에서 죄와 피의 관

계성을 살피면, 유대인들의 속죄 의식인 속죄제(레위기 4장)는 승의 피를 대가로

죄를 용서 받는다는 것에 근거하여 예수의 피가 원죄(아담의 죄)를 속죄한다는

원관(마,26;28)이 기독교의 핵심 교리이고 보면, 성경적이고, 교리적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이 경우 원죄와 구원에 대하여 보편적 진리의 차원에서 재 해석이 필요

고 본다.

 

   셋째, 따라서 원죄와 구원에 대해 구원자로 이 땅에 온 예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 때,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단지 선악과라고 명명된 과일을 따먹었다고 하는

사건(창,3;6)이 인류가 지은 원죄의 원인이라면,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하나님과

더불어 행복했던 주객미분의 에덴의 삶을 접고 주객이분의 세상으로 겨나와(?)

오히려 인간으로서의 근본이 되는 땅에서의 삶(창,3;23)을 위해서는, 에덴에서와는

달리 먹고 살기 위한  땀흘림과 종족 보전을 위한 분만의 고통(창,3;16~19)이 따르

된다. 물론 개인의 욕심의 정도에 따라 그 고통의 차이가 있기 마련일 것이다.

러나 이는 죄라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의 삶에 수반되는 필수 불가결한 가치인 것

다. 다만 주객분의 세상은 원래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곳이 아니

때문에 참 행복을 위해서는 진리의 깨달음이 요구되는 곳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는 진리 안에서의 거듭남을 통한 천국을 제시(요3,;1~8)한다. 그렇다

면, 원죄는 죄라는 표현 보다는 주객이분의 세상 가운데서 현실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자업자득의 고통이요. 이에 대한 구원은 진리 안에서의 자유(요,8;32) 즉, 진리

인 예수의 말씀을 깨달은 객초월의 거듭난 삶이 구원 받은 자가 누리는 천국이라

는 재 해석가능하다. 

 

   끝으로, 예수의 정체성(본질)이다. 예수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예수(요,14;6)"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

는다(요,12;24)"고 한 말씀보더라도 예수의 본질은 유한한 육신에 있는 것이  아니

라 영원한 진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 안에서의 자유가 진정한 자유이며 천국이라

는 의미이다.

   이를 논리적 공식으로 다시 정리하면, "A는 B이다"라는 명제에서 "A"가 "B" 이기

해서는 "A"의 부정이 전제되어야 "B"의 완성이 가능하다는 론리에 따라, 하나님이 아

들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계획하신 진리의 사명을 다 이룬(요,19;30) 후, 잠시

(33년간) 입었던 육신을 십자가 위에 걸어 두고, 하나님이 되어 부활 승천하였는데,

어리석은 인간들은 그분의 유한한 육신적인 한계의 너머를 보지 못하고 예나 지금이

나 흑암 속의 희비에 놀아나고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번 이 사건을 진리와 거리가 먼 구약의 역사적이고 문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이스라엘 정부의 태도가 미온적인 것을 보더라도 무한한 진리로써의 예수를 지

협적인 이스라엘의 역사적 시공 안에서 왈가왈부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진리를 부정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부족한 이 글이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의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 오늘의 기독교인

들에게 진리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갖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