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아니니 모두가 같아서 포용하지 않음이 없다.”

 

  둘 아니니 모두가 같다는 것은 둘의 바탕이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不二의 절대 세계에서는 일체 만물의 대립은 다 없어지고 거기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 없게 되며, 선과 악이 둘이 아니게 된다. 변화하는 시대와 역사 그리고 문화에 따라 선이 악이 되고 악이 선이 되기도 하는 것은 선악(善惡)이라는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不二의 진리인 불성(佛性: 神性)과 하나(One)가 되는 경지에서는 아름다움(美)과 추함(醜), 행복(幸福)과 불행(不幸), 득(得)과 실(失)등도 둘이 아니라 하나(One)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11-32)

 

  젊은 탕자는 타락하여 그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가 그의 아버지에게 돌아감으로써 평안하게 되는 구원을 누리게 되었다. 그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와 같이 “그림자와 같은 가상(假相)인 겉사람(ego)를 죽이고 영원한 실상(實相)인 속사람(true Self)을 되찾아 하나(One)가 되어”(막 8:25, 요 17:21) 많은 열매를 맺는 비유이다.

  아버지는 탕자가 돌아옴으로써 너와 나의 구별이 사라진 전체(One)가 되어기에 이웃과 더불어 함께 즐거워하고 기쁨을 나누었다.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고 하여 “전향적 변화”(회개: metanoia)를 한 아들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완벽한 깨어 있음으로 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천국은 자기 밭에 보물이 묻힌 것을 모르고 그 밭을 가지고 있던 사람과 같으니, 저가 죽으면서 그 밭을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었느니라. 그 아들은 보물이 묻힌 것을 모르고, 자기가 유산으로 받은 밭을 팔았더라. 그 밭을 산 자가 밭을 갈다가 그 보물을 찾았더라. 저는 그 돈을 원하는 자에게 이자를 받고 빌려주기 시작하였느니라” (도마복음 109).

 

  마태(13:44)는 천국의 비유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윤리적으로 볼 때 이 사람은 탐욕이 가득찬 나쁜 사람이다. 왜냐하면 보물을 찾았으면 밭 주인에게 말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영적 어둠의 겉사람(ego)에 가려져 내면에 있는 光明의 천국 즉 神性(true Self)이 숨겨져 있는 지도 모르고 있다. 그것을 발견하기 위하여 도와줄 수도 없다. 다만 이 보물을 발견하기 위하여 애를 쓰는 사람에 의해서만 발견되어 질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조건이나 중재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