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한번 말씀드리자면, 인간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악의 문제, 특히, 선하신 하나님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왜 이 세상에는 악이 존재하는가? 라는 물음은 비단 오늘날에만 제기되어왔던 문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악의 문제는 신의 존재와 속성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함에 따라, 이른바 변신론(신을 변호하는 견해)을 주장하게 되었지요. 특히, 악의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은 것으로, 그 종류는 물리적인 악(자연적인 악)과 도덕적인 악으로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악은 세계에 버젓이 고개를 쳐들면서, 인간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고 있지요. 

따라서 이 악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하는가? 란 물음은 매우 중요한 사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악의 문제는 우리의 믿음과 신앙에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게 되거나, 예기치 않은 상황, 억울한 것처럼 보여지는 일이 왜 나에게만 일어나는 것일까? 왜 열심히 잘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이처럼 불합리한(?) 일들이 생겨나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 안에 내포된 악의 문제는 우리의 믿음과 신앙에 큰 훼손을 줄 수가 있기에 매우 중요합니다. 

지난번 말씀드린대로, 하나님과 악의 문제에 관하여 아래 언급한 참고서적들을 읽고서, 나름대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하나님과 악의 문제에 관한 소고

   하나님은 왜 악을 이 세계에 허용하시는가? 라는 물음은 신에 관한 본질, 그리고 성품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 이러한 질문은 각 시대마다 던져진 매우 중요한 물음들 중에 하나였는데, 하나님이 세상에 최고선으로,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수없이 나타나는 악의 문제는 인간들을 늘 괴롭게 하였다. 즉 하나님께서 선하게 창조하신 이 세계에 악이 발생할때마다, 제기된 질문은 하나님과 악의 문제가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가? 였고, 이러한 질문은 인간을 매우 혼돈스럽게 하였다.

이를테면, 아래의 명제1-3까지는 하나님의 속성(성품)에 관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아주 잘 대변하고 있다("신앙과 이성" 로날드 내쉬(저), 이경직(역), 살림(출), p.299.) 하지만, 이러한 명제 자체가 악의 문제가 대두되는 현실 속에서는 별로 와닿지 않는 것들로 취급되어지곤 했다.

1) 하나님은 선하시다(최고선).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신다. 그가 사랑하시는 창조물이 악과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신다.
2)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전지성). 그는 그의 창조물을 악과 고통에서 건져내실 방법을 알고 있다.
3)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전능성). 하나님은 그의 창조물을 악과 고통에서 건져내실 수 있다.

위의 세 가지 명제에 대해서 기독교인들은 매우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세계에 악이 존재한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선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지만, 이러한 믿음은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 앞에 그만 무릎을 꿇고 만다.

이에 대해서, 에피쿠로스는(BC341-270) "하나님은 악을 없애고 싶어도 능력이 없거나, 또 능력은 있어도그럴 마음이 없거나, 능력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거나, 이 셋 중의 하나일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원하는데 능력이 없다면, 그는 무능할 것이고, 능력은 있는데, 원하지 않는다면, 그는 악할 뿐이고, 또 능력도 있고, 악을 없앨 마음도 있다면,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했겠느냐?"라는 말을 하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비롯하여 그의 전능성과 전지성, 심지어 선하신 성품마저도 부정하고 있다("특종, 믿음사건" , 리스트로벨(저), 윤종석(역), 두란노(출)).

이처럼 악(고통)의 문제는 기독교 신앙의 최대 도전이고, 또 기독교적 믿음과 관련해볼 때, 하나님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악이 세계에 버젓이 존재한다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에 관하여 존스토트는 말하기를, "악(고통)의 정체는 의심할 나위없는 기독교 신앙의 최대 도전으로, 모든 세대에 있었다. 단, 악의 정도와 빈도에 따라 무작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각 시대마다 민감한 영혼이라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악(고통)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을 지 의문을 갖도록 만든다" 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위와 같은 책 인용).
 
그렇다면, 하나님이 존재하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에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해결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즉, 악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존재하심, 내지는 그의 전능성과 전지성을 훼손시키고자 하는 자들에 맞서 어떻게 하나님과 악의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을까?

먼저, 하나님의 속성(Attributes)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1.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발언, "전능한 존재는 절대적으로 모든 일을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속성으로,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더불어 하나님이 절대로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는가?" 란 명제에 관하여 생각해 보자. 이 명제는 하나님의 전능성(全能,Omnipotence)에 관한 것으로,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은 악이 없는 세상을 창조할 수 있다" 라는 결론을 얻어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가?" 라는 말에 대해서도 역시, "하나님은 악이 없는 세상을 창조하실 수 있는 전지하신 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두가지 사실 자체가 기독교의 본질을 이루는 주장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이라는 측면과 연관시켜 생각해볼 때, 하나님의 전지,전능성은 그의 능력에 제약이 있는 것과 양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전지전능성은 모순을 뜻하지 않는 가운데서의 가능성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전지 전능성이 모순을 뜻하는 것이라면, 그의 전능성의 범위에 들어오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에는 가능성이라는 양상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는 것이다. 

즉, 어떤 것은 "물리적 가능성"이나 "논리적 가능성"이라는 두 가지 방식 속에서, 가능하거나,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물리적 가능성 뿐만 아니라 논리적 무모순성이 하나님의 전능성의 필요조건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알리스터 맥그라스(Alister Mcgrath)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전능하다" 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앞에서 말한, 아퀴나스의 말처럼, 물리적 가능성이나, 논리적으로도 모순율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네개의 꼭지 점을 사용하여 삼각형을 만들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답할 수 있겠는가? 또한  "하나님이 들어올릴 수 없는 무거운 돌을 창조하실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해서 어떠한 답을 할 수 있겠는가?,

먼저, 첫번째 질문을 생각해보자면, 삼각형은 세 개의 꼭지점을 가지고 있는데, 네개의 꼭지점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삼각형이 아니라 사각형을 그려야 할 것이라는 결론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두번째 물음에 대해서, 만일 하나님께서 돌을 창조할 수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전능성이 훼손될 수 있고, 반면에, 이런 돌을 창조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돌을 창조하였으나, 자신이 들어올릴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므로, 이것 역시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할 수 없는 일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들은 더 생각해보기도 전에, 이미 많은 모순성을 담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다는 사실은 논리적인 모순이 포함되지 않음 속에서, 참 선으로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적인 면에서, 하나님은 선하신가? 하나님은 전능하신가? 하나님은 전지하신가? 라는 모든 물음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말은 물리적 가능성, 내지는 논리적으로 모순율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에라야 가능한 설명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기독교 기초신학", 알리스터 맥그라스(저), 박태수(역), CLC). 

부언하자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은 이러한 일들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러한 일을 하지 않는다" 라고 말하고 있다.

논자가 생각해 볼 때, 성서 안에도 이와 같은 맥락 속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마태복음4:1-11절까지의 말씀으로, 모순율의 대명사라할 수 있는 마귀와 참 진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화이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는 마귀의 제안은 모두가 다 모순성에 기인한 것이다. 

마귀의 첫 번째 제안,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내뱉는 그의 말, "돌덩이를 떡 덩이가 되게 하라"는 말 자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물리적으로, 돌을 떡 덩이가 되게 하라" 라는 말로, 물리적인 가능성을 보이라고 하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이에 따른 예수 그리스도의 반응은 이미 마귀의 제안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의 모순율을 담고 있기에, "할 수 없는 일(하지 않는 일)로 치부해 버린다. 뿐만 아니라, 잇따라 언급된 마귀의 두번째, 세번째 제안은 하나님의 입장에서의 논리적 모순성을 드러내고 있기에, 철저히 배제시키고 있다. 

위의 예도, 앞서 언급한 바대로, 하나님의 전능성은 물리적 가능성조차 모순율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가능하다는 사실, 그리고 논리적 가능성 조차도 모순율을 담고 있지 않을 때에라야 이러한 모든 것들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2. 선에 대립되는 악의 문제, "세상에는 악이 존재한다. 그 악을 하나님께서는 왜 허용하시는가?, 악은 선과 결부시켜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선이 악을 없앨 수 있는가? 그것은 참인가?"("신앙과 이성", 로날드 내쉬(저), 이경직(역), 살림(출))

먼저, 선에 반대되는 악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자. 일반적으로 악의 종류는 "물리적인 악(자연적인 악)"과 "도덕적인 악"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악은 인간의 자유의지나 자연법, 내지는 영혼을 연단하는 일로도 얼마든지 도출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지진, 폭풍,  태풍,  해일 등과 같은 "물리적 악"과 인간의 결정과 행동에서 나오는 "도덕적 악"이 일반적인 악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악은 세계에 있으며, 인간으로 하여금 불안과 염려와 걱정을 유발시키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악은 어디에 있는가?" 두말하면 잔소리겠지만, 이러한 악(고통)은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 내에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악은 왜 이 세계에 존재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왜 이 악을 없애지 않고, 허용해 두시는 것일까?" 란 물음을  갖는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물음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보기를, 하나님이 일부 악을 없애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해보자. 

하나님께서 세상에 존재하는 일부 악을 없앴다. 그러면, 악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까? 아마도 악을 없애면, 보다 더 큰 악이 있게 될 것이다. 또는 큰 선이 있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망치로 내 손가락을 칠 때 생기는 고통이 악이라 하자. 그리고 의사가 내 손목을 자르면, 엄지 손가락의 고통을 없앨 수 있다고 말했다 하자, 그렇다면, 그 의사는 악을 하나 없앨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보다 더 큰 악을 유발했다는 것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즉, 보다 더 큰 악이 있는 상황이나, 더 큰 선을 희생해야만 없앨 수 있는 악이 세계에는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같은 책, 참조). 

이처럼 "선한 존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선이 악을 제압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 것 같은데, 왜 선이 악을 제압하지 못하는 것일까?", "최고선(참선)이신 하나님은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을 없애지 않는 것일까?" 라는 물음이 제기된다. 

이 물음에 대해서, 우리는 악에서 더 큰 선이 나오게 된다는 것, 만일 그러한 악이 없었더라면, 선이 나올 수 없었다거나, 또는 그 정도로 위대한 선이 나올 수 없었다는 이유를 들어, 위 물음에 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악으로부터 선을 이끌어내실 수 없었다면, 악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교도들조차 인정하듯이 모든 것에 대해 최고의 능력을 지니신 하나님은 그 자신이  지극히 선하시다. 악으로부터 선을 이끌어 내실 정도로 전능하고, 선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피조물 가운데 그 어떤 악의 존재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하나님의 섭리", 폴 핼름(저), 이승구(역), Ivp)

그리고 또 다른 것으로, 하나님께서 특정한 악을 허용할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만일 그런 악을 없애면, 그 결과 더 큰 악이 있고, 더 큰 선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것. 

이에 대해서, 알빈 플란팅가(Alvin Plantinga)는 "더 큰 선을 잃거나 더 큰 악을 낳지 않기 위해서, 좋으신 하나님은 할 수 있는 한 악을 없앨 것이다" 라고 말한다("신과 타자의 정신들", 알빈 플란팅가(저), 이태하(역), 살림(출)). 

3. 악의 문제와 관련된 세 가지 노선의 대답들.

악의 문제에 대해 답하려는 시도는 대부분 한 가지 기본 주제를 변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은 왜 이 세상에 악을 허용하시는가?, 그것은 보다 더 큰 선을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거나, 또는 더 큰 악을 피하기 위해서 라는 것이 기본 주제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악을 허용하시는 이유는 언제나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솔직하게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관하여 전혀 모를 수밖에 없다는 것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더 큰 선을 가져오는데 필요하거나, 더 큰 악을 막는데 필요하기 때문에 악이 생긴다고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과 악의 문제에 관해서, 다음 세 가지 사항을 고찰해 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세계에 악을 허용하시는가?" 라는 물음에 대하여, 첫째로, 사람의 자유의지, 둘째로, 규칙이 지배하는 자연법, 셋째로, 도전에 직면하여 성장하고 발전하는 사람의 가치와 중요성에 각각 호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이 세 가지 노선의 반응으로 각각, 자유의지 신정론, 자연법 신정론, 영혼의 연단으로서의 신정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노선을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왜 이 세계에 악을 허용하셨는지 그 이유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우리는 여기서 언급한 세 가지 노선으로 위의 물음에 관하여 조금이나마 도움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먼저, 자유의지 신정론이란 무엇인가? 

신정론이라함은 하나님은 악이나 화를 좋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바르고 의롭다고 말하는 이론을 말한다. 즉 이 세상에 악이나 화가 존재한다는 이유를 들어 신의 존재를 부인하려는 이론에 대응하여 생긴 이론이 바로 신정론이다.

기독교 교회사를 보면, 대부분의 기독교 사상가들은 신정론을 내세우면서, 세계에 존재하는 악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미 아우구스티누스라든지, 라이프니츠는 소위 변신론을 주장하여왔다.

특히, 현대의 알빈 플란팅가는 *자유의지의 변호, 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유신론자들이 다소 전통적으로 자유의지에 호소하는 것을 하나님이 악을 허용하실 수 있다는 논리적 근거로 삼았다. 

자유의지 신정론이란, 세계에는 악이 많이 존재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악은 도덕적 악을 말하는데, 이것들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의미있는 도덕적 자유를 주신 결과로 생겨 나게 되었다. 결국, 하나님은 도덕적 악을 허용하신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다 더 큰 선을 낳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바로 악이 세계에 존재하는 이유라 할 수 있다.

두번째로, 자연법 신정론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타당한 과학으로 설명하는 자연법칙이라는 질서를 가진 우주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자연법 신정론은 이처럼 창조물은 법칙에 다라 질서있게 존재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많은 목적에 필요한 조건이 그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규칙적인 자연적 질서 안에서조차 악이 존재한다. 즉 앞에서 언급한 홍수나 지진, 태풍, 해일 등과 같이 구체적인 자연적 악이 일어남으로써, 사람들에게 고통스럽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창조하시고, 자연적 규칙성과 질서 있도록 하셨기 때문에, 비록 예측할 수 없이 나타나는 자연적인 악이라 할지라도 그 악이 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현재 우리의 세계 질서와 같은 것이 없었다면, 선은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영혼 연단으로서의 신정론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교제하기를 원하는 덕 있는 존재를 만들려 한다면, 이러한 개별자는 도전에 직명하게 된다는 영혼의 연단으로서의 신정론이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하시는 성품이 있는데, 이러한 성품을 지닌 우리를 창조하실 수 없었다. 따라서 우리는 투쟁, 갈등, 도전에 관여함으로써, 그러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도전과 진정한 손실의 위협이 있는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면, 덕의 성향을 발전시킬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은 도전하는 환경이 우리를 둘러싸도록 설계 되어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우리는 성장하게 되어있고,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모습으로 성숙한 인격을 갖춘 자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견해이다.

* 자유의지의 변호,------------------------------------------------------

   그에 따르면, 하나님이 악이 있는 세상을 창조하실 수 있는 이유의 사례가 사람에게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자유의지 변호를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의미 있게 자유로운 창조물이 있는 세계를 창조하실 만큼 좋은 이유를 하나님께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윌리엄 에이브러햄의 말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유로운 행위자로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악의 원인이 아니시다. 하나님이 뜻에 반대되게 행동하는 사람이 악을 낳았다. 그들은 지금 그들이 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길을 선택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람의 선택을 제한하실 수 있었다. 또는 사람을 창조하시지 않음으로써, 악을 막으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말 그렇다면, 하나님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을 창조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참된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을 하나님은 창조하셨다. 그래서 도덕적 악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믿음과 모순되지 않는다. 논리적으로도, 모순되지 않고, 합리적으로도 모순되지 않는다" 도덕적 악의 가능성을 완전히 없애려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의미있게 자유로운 도덕적 행위자를 창조하실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야 할 것이다. 결국, 플란팅가에 따르면, "다른 것이 모두 다 같다면, 의미있게 자유로운 (악한 행위보다 선한 행위를 자유롭게 더 많이 행하는)창조물이 있는 세계가 자유로운 창조물이 전혀 없는 세계보다 더 가치가 있다"

* 참고서적, ----------------------------------------------------------------------------------------------------------------

1. "신앙과 이성", 로날드 내쉬(저), 이경직(역), 살림(출)
2. "특종, 믿음사건", 리스트로벨(저), 윤종석(역), 두란노(출)
3. "기독교 기초신학", 알리스터 맥그라스(저), 박태수(역), CLC(출)
4. "하나님의 섭리", 폴 헬름(저), 이승구(저), IVP(출)
5. "God, Freedom and Evil(Grand Rapids: Eerdmans, 1974).
6. "왜 하나님은 악을 세상에 허용하시는가?", 김서택(저), 홍성사(출)
7. "신과 타자의 정신들", 알빈 플란팅가(저), 이태하(역), 살림(출)